며칠 째 글을 못 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글은 소설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썼던 블로그 포스팅과 브런치 글을 말한다. 글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후부터 매일 글을 썼다. 나의 정체성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매일 글쓰기는 삼시 세 끼처럼 당연한 것이다.
책은 매일 읽고 있다. 중학교2학년인 큰 딸과 여름방학 동안 청소년권장도서 10권 읽기를 목표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왔다. 딸과 똑같이 읽고 저녁에 독서기록장을 작성하고 바꿔 읽는다. 지금까지 5권의 책을 읽었다.
동서문학상에 응모하기 위해 소설멘토링 게시판에 단편소설 3편을 올렸다. 예전에 썼던 글들이었는데, 젊고 유능한 소설가들의 신랄한 지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혼자 글을 쓰며 어색하거나 이상했던 부분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앞으로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고쳐나갈 예정이다.
그렇게 생각만 하고 있다. 며칠 째 글을 못 쓰고 있다. 세 아이가 집에 있다. 제주시의 여름은 35도가 기본이다. 아이들 방에 에어컨을 켜 놓고 생활하고 있다. 진짜 못 견디게 더운 날에는 거실에도 에어컨을 켠다. 쾌적한 커피숍에 앉아 글을 쓰고 싶지만, 내가 나간다고 하면 줄줄이 사탕들이 너도나도 손을 든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아이들도 자신만의 생활계획표가 있다. 고지식한 큰 딸은 계획표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 뭘 할 때도 시계를 보며 체크한다. 아들은 여름방학 다음날부터 학교에 갔다. 9시부터 50분 동안 컴퓨터 수업을 받고, 그 후 두 시간 동안 대회준비를 한다. 대회가 막바지라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막둥이는 공부하는 언니 옆에서 눈치껏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다.
사실 글을 쓰려고 하면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우리 집 아이들은 고양이 같다. 자신만의 영역 안에서 혼자 뒹구는 걸 좋아한다. 엄마는 제때 밥만 잘 챙겨주면 된다. 그런데도 왜 글을 못 쓰는 걸까?
뭘 써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내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 왜 이런 소설을 써야 했는지, 그래서 인물들은 왜 그렇게 움직이고 생각하는지 나도 모르겠다. 작가가 모르는 걸 독자는 알 리 만무하다. 그래서 내 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지적한다. 그걸 아는데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게 두렵다. 진짜 쓰고 싶은 것을 써도 될지 모르겠다.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속 없는 과대포장이다. 좋은 글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진심은 언제나 옳다. 빙빙 돌려 말하는 건 재미없고 지루하다.
외줄 타기를 한다고 생각해 보자. 높이 올라갈수록 위험은 커지고 긴장감은 고조된다. 외줄 위에 올라선 사람이나 밑에서 올려보는 사람이나 손에 땀을 쥔다.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긴장이 최고조에 이를 때쯤 줄이 철렁거리면 보는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린다. 이미 행위자와 시청자는 하나가 된 지 오래다. 한마음으로 성공을 기원한다. 어떤 이는 줄에서 떨어지는 것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에만 최선을 다한다.
한 번도 그렇게 글을 써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을 내던지는 마음으로 문장을 만들어낸 적이 없다. 그저 나오는 대로 써 내려가면 글이 되는 줄 알았다. 적당히 문맥이 맞고, 그럴듯하게 문장을 만들어냈다. 간파당했다. 부끄럽다. 글을 못 쓰는 이유는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다. 속을 뒤집어 꺼내고 부끄러움에 벌겋다 못해 얼굴이 하얘지는 순간이 온다 해도 글을 쓰고 싶다. 누가 더 간절하냐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