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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Aug 02. 2024

멀고 먼 소설가의 길

여름방학 동안 중2인 큰 딸의 독서량을 늘리고 싶어서 학교도서관에서 중학생 권장도서 10권을 빌려왔다. 혼자만 읽으라고 하면 인상 쓸 게 뻔했다. 예쁜 독서기록장 두 개를 장만해서 나눠갖고 매일 한 권씩 책을 읽기로 했다. 같이 읽고 독서기록장을 작성해서 바꿔 읽으며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도서관 권장도서책장에 있는 책들 중에 제목을 보고 선택한 책들이라 사전정보가 없었다. 소설책 7권과 인문학 관련 3권이었는데, 소설을 먼저 읽었다. 큰 딸은 지금까지 7권을 읽어서 내게 넘겼고, 나는 5권을 읽었다.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독서시간으로 정해놓고 책을 읽고 있다.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아들을 데리러 갔다 오고, 점심준비를 한다. 어제 오전의 일이다.



커피를 내린 김에 아이들이 마실 간식거리를 들고 방에 들어갔는데, 큰 딸의 눈이 빨갛다. 왜 울었냐고 물었더니 손에 든 책을 내민다. 우리 집 아이들은 나를 닮아서 책 읽다 말고, 영화보다 말고 잘 운다. 어떤 때는 노래를 들으면서 운다. 남편과 막둥이는 그런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절로 나오는 눈물이 있다는 것을


잔뜩 움츠려든 딸을 꼭 껴안았다. 큰 딸이 대성통곡을 한다. 안 되겠다 싶어 부엌으로 데리고 나와 식탁에 앉혔다. 자몽에이드 한 잔을 내밀었다. 홀짝거리며 음료를 마시던 딸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엄마, 그런데 왜 엄마가 빌려온 소설들은 다 슬퍼?

-그래? 슬퍼? 그런데 내가 슬픈 소설이란 걸 알고 빌렸을까?

-그냥 빌렸는데 다 슬픈 거야?

-그렇게 됐나 봐.


-그런데 **아. 원래 세상살이가 슬프고 아프고 그래. 속상하고 힘들고. 그걸 이야깃거리로 만든 게 소설이니까. 소설은 현실에서 있음직한 일들을 작가가 상상해서 쓴 거잖아. 

(여기서부터 갑자기 국어선생님으로 바뀐다.)

-어떤 마을에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던 소년이 갑자기 도깨비들의 습격으로 가족들이 다 죽어. 그리고 여동생은 혈귀가 돼. 그래서 착한 오빠가 여동생을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고생하는 이야기가 뭐지?

-귀멸의 칼날.

-그래. 그런데 잘 생각해 봐. 어떤 마을에 가족과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소년이 있었어. 착한 소년은 착한 소녀를 만나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았어. 그렇게 쓰면 소설이 재미있을까?

-아니.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사건이 일어나야 해. 사건은 슬프고 강렬할수록 좋아. 왜냐면 주인공이 각성하려면 강력한 계기가 있어야 되거든 (스티븐 킹은 이것을 주인공을 위험에 던져놓고 어떻게 탈출하는지 본다고 표현했다). 탄지로에겐 그게 가족의 죽음과 네스토가 혈귀가 된 거야. 탄지로는 원래 싸울 줄 모르는 착한 아이였어. 그렇지? 그런데 동생을 지키려면 강해져야 해. 그래서 귀살대에 들어가 체력 훈련을 받는 거야. 혈귀와 싸우면서 강해지는 거고. 소설에서 중요한 건 주인공의 변화야. 그러니까 잘 살고 있던 어느 날 어떤 일이 생겨나서 펑. 하고 터지고 그 후로 모든 것이 바뀌어. 이야기는 주인공이 어떻게 위기를 헤쳐나가면서 문제를 해결하느냐를 보여주지.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같이 주인공을 응원하는 거고.


내 말에 취한 그 순간 자잘한 소름이 끼쳤다. 엄마의 변화를 눈치챈 딸이 왜 그래? 하며 쳐다봤다.


-이, 그래서 내 소설이 재미가 없었구나. 생각해 보니까 내 소설 속 인물들은 갈등이 없어. 위기상황도 애매하고 일이 생겨도 뭔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 그냥 무덤덤해. 보여주기만 하고, 생각하게 만들진 않아. 그래서 인물이 매력적이지 않다고 했구나.


-엄마. 누구한테 하는 소리야?


-어? 나한테. 


-뭐야?


그새 마음이 진정된 딸이 웃음을 보였다. 레모네이드를 다 마신 딸은 다시 책을 읽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엄마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는 말을 남기며.


부엌에서 김치양념을 만들며 생각했다. 내가 쓰고 싶은 게 하고 싶은 이야기인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인지. 속에서 참지 못해 나오는 하소연인지 오랫동안 곱씹으며 다듬고 다듬어 만들어낸 작품인지.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가 아니라 시원한 방 안에서 훈수를 두는 해설자였다. 혼자 아는 체는 다 하면서 정작 해 보라면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었다. 


내 소설을 읽은 사람이 말했다. 시집살이하는 여자치고는 너무 아무렇지 않다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와 모진 시누이들을 생각하면 화가 날 법도 한데 아무 행동도 없어서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나는 소설 속에서조차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착하게 쓰고 싶었다. 속에서 천불이 나도 얼굴표정은 아닌 척 유지하며 살다 보니 글도 그렇게밖에 쓰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글을 쓰면서도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니까 진실과는 더 멀어졌다. 진실이 아니므로 읽는 사람이 무덤덤했다. 간과하고 있었다. 진실한 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모르는 것보다는 아는 것이 낫고,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더 좋다. 이제 알았으니 실천하면 된다. 매번 이렇게 넘어지고 아파하면서도 앞으로 나가는 걸 멈추지 않는다. 아직 그럴 힘이 있다. 나는 토끼가 아니라 거북이다. 가자. 앞으로.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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