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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Aug 25. 2024

무화과 열매

나는 시어머니와 앞뒷집에 산다. 세 아들 중 막내인 남편과 결혼했는데, 그렇게 됐다. 처음에는 불편했는데 21년이 넘은 지금은 익숙해졌다. 큰 형님은 가끔 어머니가 안 계시다며 우리 집에 뭔가를 놓고 간다. 우리 집은 시댁 식구들이나 어머님 친구분들이 어머님의 안부를 전하기 위해 들리는 곳이다. 그것 역시 그러려니 한다.


얼마 전 큰 형님의 전화를 받았다. 어머님이 전화를 안 받는다며 잠깐 나와 달라고 했다. 우리 집은 주차장이 따로 없다. 형님이 온다는 말에 냉장고에 있던 하우스감귤을 챙겼다. 파치귤(비상품귤이라 모양이 좋지 않은 대신 싸고 맛있다)이지만 맛이 좋았다. 형님은 차 안에서 검은 비닐봉지를 건넸고, 나는 차 문을 열어 종이가방을 놓았다. 형님이 어머님께 가져다 드린 건 금방 딴 무화과였다.


저녁 무렵에 형님이 전화했다. 혹시 무화과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는다고 대답했다.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는데 한 시간쯤 지나 다시 전화가 왔다. 십 분 후에 도착이니 도로에 나와 있으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사 왔다고 하셨다. 


-형님, 안 그러셔도 돼요. 그거 파치귤이라 엄청 싼 거예요. 모양도 안 이뻐서 제가 드릴까 말까 한 건데 형님이 이러면 저 창피해요.

-아니야, 동서 귤 너무 맛있더라. 무화과는 친정아빠가 따 주신 거야. 우리 과수원에 무화과 한 그루가 있어서 친정아빠가 해마다 따시는데 난 안 좋아해. 동서가 먹으면 나도 좋지.

-형님한테 이렇게 받기만 해서 어뜩해요. 너무 고맙습니다.



형님이 사다 준 31가지 아이스크림을 작은 상에 올리고,  방에 들어가 있던 아이들을 불렀다. 저녁을 먹고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이 귀찮다는 얼굴로 나오다 아이스크림을 보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무화과는 금방 땄는지 꼭지에 하얀 게 묻어 있었다.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나는 잘 익은 무화과 하나를 먹었다. 심심했다. 입맛이 변했다. 아무 맛없는데 맛있었다.


어렸을 때 살던 집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하나네 집 마당에 커다란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어찌나 큰지 가지가 우리 집 마당에 넘어와 그늘을 만들었다. 낮은 돌담을 넘으면 바로 무화과나무가 있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열리면 아빠는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하나네 아빠는 멀리 가서 일하고 있었고, 하나네와 살고 있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았다. 아빠는 무화과를 잔뜩 따서 하나네 할머니가 건네주는 소쿠리에 담았다. 커다란 파란 소쿠리에 무화과가 가득 담겼다. 하나네 할머니는 빨간 바구니에 무화과를 담아서 아빠에게 건넸고, 엄마는 아빠가 따고 온 무화과를 맛나게 먹었다.


엄마가 하도 맛있게 먹어서 나도 하나 집어 먹었다. 입에 넣는 순간 물컹거리는 게 싫었다. 삼키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리며 뱉어내는 날 보며 엄마와 아빠가 웃었다. 나는 이렇게 못 생기고 맛없는 걸 왜 엄마가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화과가 떨어질 때쯤 아빠는 다시 하나네 무화과나무에 올랐고, 엄마는 여름 내내 아빠가 따다 주는 무화과를 먹었다.


형님이 갖다 준 무화과 덕분에 그때 생각이 났다.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는데, 형님 덕분에 엄마가 젊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형님은 모르겠지만 무화과를 먹으며 나는 울컥하고 올라오는 그리움을 꾹 삼켰다.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이 그렇게 연결된다. 무심코 한 행동에 누군가는 옛 추억을 떠올리고,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에 마음에 상처 입는 사람이 있다. 안 보고 안 만나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지만 또 사람이란 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동물이라 언젠가 누군가와 만나고 말이든 물건이든 마음이든 주고받게 된다. 


마음 깊숙이 숨어 있던 감정이 사소한 것들에 의해 흔들린다. 냉장고에 있는 무화과를 다 먹을 때까지 나는 엄마를 그리워할 것이다. 지금은 남보다 더 미운 사람이 됐지만 한때 지독하게 엄마를 사랑했던 아빠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움을 조금 밀어낼 수도 있다. 하나만 생각하면 못 견디는 일들도 뒤집어 생각하면 그리 큰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말은 생각이 모여 나온다. 얼마 전 아빠에게 모질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다음번에는 아빠가 따다 준 무화과만큼 누그러진 말이 나올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환공포증이 있는 큰 딸이 반으로 가른 무화과를 보더니 기겁하며 달아났다. 먹을 것에 유난히 욕심이 많은 막둥이가 한 입 먹더니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래, 먹지 말아라. 클레오파트라도 무화과 먹으며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했지만,  젊고 예쁜 너희들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늙고 힘없는 나만 먹고, 남은 힘이나마 짜내보련다.  고마워. 이 맛난 걸 혼자 먹게 해 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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