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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마누 Sep 25. 2024

이런 생각을 하면 꿈자리가 사납다

좀 놓아주기도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한다

 나는 행운아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우리는 방 하나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7살이자 큰 딸이었던 나는 트럭에 생선을 싣고 장사하는 부모님을 대신해서 4살과 1살 동생을 돌봤다. 갓난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4살 난 동생의 손을 잡고,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서 아빠차를 기다리곤 했다. 종일 동생들을 돌보느라 지쳐 잠이 들었다가도 엄마, 아빠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느 날인가. 엄마와 아빠가 케이크이라는 걸 들고 와서 둘이 소곤거리며 먹고 있었다. 엄마가 다 먹기 전에 자연스럽게  오줌이 마련운 것처럼 눈을 비비며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왔다. 새벽이었고, 이불 옆에 둥근 스테인리스상위에 먹음직스러운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동생들은 곤히 자느라 케이크가 얼마나 예쁘고 맛있는지 몰랐다. 자다 깨서 먹은 케이크는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고 부드럽고 맛있었다.


 나는 행운아다.

시내 단칸방에서 어린 딸 셋을 키우는 게 힘들었던 부모님은 할머니네 집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고등학생이었던 삼촌은 졸지에 작은 방으로 밀려나갔고, 우리 5명이 안방에서 살았다. 큰아들인 아빠는 집에서 목소리가 제일 컸다. 요리하는 걸 좋아했던 할머니와 먹는 데 큰 관심이 없었던 엄마는 자주 부딪쳤다. 할아버지가 마당 끝에 작은 집을 짓더니 할머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아빠는 할머니네 집 옆에 화장실을 만들었는데, 문이 없었다. 우리 집은 버스가 지나가는 큰길에 있었는데, 화장실에 가는 걸 오가는 사람들이 다 봤다. 배가 자주 아팠던 나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거리를 힐끔거리며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아빠는 딸 셋이 아무리 말해도 화장실문을 만들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한밤중에 후레시를 들고 화장실에 같이 가 주는 동생이 있어 덜 외로웠다.


 나는 행운아다.

나는 집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30분 걸리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시내버스보다 시외버스비가 비쌌는데, 엄마는 버스비를 제때 준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집 근처에 있는 조각공원 주차장에서 주차요금을 받았다. 동네 노인회에서 운영하는 건데 관광객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수입이 짤짤 했다. 주말이면 우리 세 자매는 서로 주차알바를 하겠다고 다퉜다. 종일 주차요금을 받으면 할아버지가 만원을 줬다. 주차 요금으로 받은 500원짜리 몇 개만 챙겨도 할아버지가 준 돈과 합치면 일주일을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가끔 주차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는 차를 스쿠터로 쫓아가며 악착같이 요금을 받았다. 급식비를 내지 않아서 게시판에 일 년 내내 이름이 붙어있었지만, 교실에서 보는 서귀포 앞바다가 기가 막혀서 틈만 나면 유리창에 매달려 바다를 보며 꿈을 꿨다.


 나는 행운아다.

 부모님은 대학입학금과 첫 해 집세를 내주는 것으로 모든 지원을 끊겠다고 했다. 나는 그것만 해도 감사해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고3겨울방학 동안 사촌동생에게 과외를 해 주며 용돈을 벌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신입생환영회나 과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나는 대학 4년 동안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다. 새벽에는 중학교 교문 앞에서 학원전단지를 나눠줬고, 오후에는 비디오방이나 커피숍, 호프집에나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대학교2학년 때 대형입시학원 경리알바를 했는데, 그게 인연이 돼서 나중에 학원강사가 됐다. 학교 생활은 당연히 등한시하게 됐다. 공부는 적성에 맞았지만, 출석이 좋지 않았다. 나는 성실하지 못한 학생이었다. 내가 제일 부러운 사람은 부모님과 함께 살며, 부모님이 등록금을 내주는 친구들이었다. 찬바람만 불면, 집 구할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혼자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됐다. 불 꺼진 자취방에 들어가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결혼한 덕분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알고 있다. 그 모든 게 온몸으로 견뎌낸 이십 대 덕분이고, 나아가 나를 강하게 키워준 부모님 덕분이었다. 그렇게 알고 살았다.

 

 부모님은 어떤 철학이나 생각이 있어서 우리는 키운 게 아니었다. 젊고 가난했던 부모님은 그저 자신들의 삶을 살기에 급급해서 딸 셋을 챙길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우린 같은 지붕아래 살면서, 생일이면 축하케이크에 초를 꽂고, 크리스마스에는 소나무에 전등을 매달고 캐럴을 불렀다. 풍족하지는 않아도 마음으로는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컸다고 자부했다.


 과연 그럴까?

현실은 천장 위에서 쥐들이 밤마다 운동회를 하고, 시멘트벽돌을 대충 쌓아놓은 화장실에 문을 달아주지 않아서 딸들에게 수치심을 주었고, 술 마실 돈, 노름할 돈을 있으면서 자식들에게 용돈 한 번 준 적 없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폭력이 우리한테 오지 않았던 건 어머니라는 방패 덕분이었다. 엄마가 우리 보고 빨리 커서 집을 나가라고 했던 건 그 모든 것을 혼자 오롯이 견디겠다는 말이었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왜 엄마는 우리만 보면 나라라고만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때 든든한 버팀목이자 그늘이라고 생각했었던 부모는 우리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그 사실을 인정하면 내가 너무 불쌍하니까 스스로 최면을 걸고 살았다. 나는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안의 큰 딸이다. 나는 다정하고 예쁜 엄마와 든든하고 멋진 아빠가 자랑스럽다.


 아니다. 대학교시절 아빠의 빚을 받으러 온 남자가 나를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혼자 집에 있었는데, 밭에서 돌아온 부모님은 남자에게 우리 큰 딸과 놀고 있으라며 다시 나가버렸다. 그 후에도 그 사람은 노골적으로 내게 접근했고, 부모님은 진지하게 만나보라고 부추겼다. 농사에 쓰는 비닐을 외상으로 사서 쓰고 갚지 못했던 부모님은 그 해 여름 나를 핑계로 또 비닐을 외상으로 얻을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나는 바보였다. 충분히 화를 낼 상황인데도 화를 내지 못했다. 내가 화를 내면 아빠가 더 큰 화를 낼 테고, 그러면 불쌍한 엄마에게 불똥이 튀었다. 나만 참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내가 잘못되면 동생들도 줄줄이 잘못된다. 큰 딸은 살림밑천이다. 네가 잘 돼야 한다. 그 말에 갇혀 살았다. 그렇게 살았다.


 나는 행운아가 아니었고, 내가 겪은 불행은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자 깊은 빡침이 찾아왔다. 원망할 대상이 없어진 나는 찬바람이 불면 가슴이 시리고 잠이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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