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을 축하하며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청소를 마친 후, 거실에 앉아, 큰 딸에게 편지를 썼다. 내일 생일이지만, 일정이 빡빡해서 오늘 저녁에 생일파티를 하기로 했다. 초등3학년인 막둥이는 직접 편지지와 봉투를 만들어 썼는데, 손재주가 없는 나는 다이소에서 산 천 원짜리 편지지에 글을 썼다.
우리 집은 생일날 선물과 편지를 준다. 내가 정한 규칙이다. 처음에는 왜요? 하며 눈을 똥그랗게 뜨던 아이들도 이제는 당연히 그러려니 한다. 잔머리대왕 아들은 편지지 두 장이 기본이라는 말에 사랑해라는 단어를 크게 써서 편지지를 채운 적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편지 쓰는 방법을 알려줬다. 나는 편지 쓰는 걸 좋아한다. 중학교 때 첫사랑을 만나고 나서 편지는 내 유일한 탈출구였다. 60초 백열등아래서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책상에 앉으면 밤벌레소리도 사랑노래처럼 들리고, 내가 마치 영화 속 비극의 여주인공이 된 것 같다. 온갖 미사여구를 총동원해서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학이다. 대상이 분명한 글은 막힘이 없다.
결혼하고 나서 맞는 남편의 첫 생일날 나는 남편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그 자리에서 읽지 않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은 쑥스럽다며 나중에 읽어본다고 했는데, 읽지 않았다. 이유를 물었더니 너무 길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생일카드를 5 문장 이내로 적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생일 축하편지와 반성문을 가르쳤다. 이제 아이들은 가족들의 생일이 다가오면 저만의 방식으로 편지를 쓴다. 잘못한 게 있을 때, 혹은 엄마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으면 방에 들어가 반성문을 쓴다.
남편과 둘이 있을 때, 아이들이 쓴 편지와 반성문을 읽어주면, 남편은 아주 뿌듯해하며 자기를 닮았다고 한다. 잘하는 거, 좋은 건 다 김 씨 집안 덕분이고, 못하고 부족한 건 엄마 닮아서다. 남편은 좋겠다. 생각이 단순해서,
아이들이 커가면서, 남편은 어디서 들었는지 학원 보내는 것보다 독서습관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건 나와 생각이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라고 하자 그러니까 네가 잘하라고 했다. 그럼 당신은 뭘 할 거냐고 물었더니, 나는 원래 책을 안 읽잖아.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아이들과 내가 책을 읽을 때, 남편은 소파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한다. 아들은 커서 아빠가 되고 싶다고 한다.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 아빠란다. 아빠는 그걸 듣고 또 좋다고 웃는다.
오늘 아침식사시간에 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소식을 전하며, 아이들에게 한강의 아버지는 유명한 한승원소설가이고, 오빠와 남동생도 모두 소설가며, 남편은 문학평론가라고 말했더니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분위기가 받을 만했네..라고 하길래 그럼 우리 집에서는 어떤 사람이 나올까? 물었다.
소파에서 핸드폰게임을 하던 남편과 아빠 옆에서 뒹굴던 아들의 눈이 순간 마주치더니 동시에 "프로게이머?"라고 대답한다.
내가 하는 말뜻을 다 알면서 꼭 반대로 말하는 게 아주 얄미워죽겠다.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읽고 쓴다. 큰 딸에게 같이 읽자고 하면 엄마는 엄마 좋아하는 거 하세요. 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라는 대답을 들어도 엄마가 계속 책을 읽으면, 언젠가 아이들도 읽을 것이라고 믿는다. 생일편지를 두 장에 맞춰 쓰고, 반성문을 육하원칙에 맞게 쓰다 보면 글쓰기 실력도 늘 것이다. 자연스럽게 책과 글을 접하게 되면 혹시 모르지. 내가 못 이룬 노벨문학상의 꿈을 남편을 닮아 똑똑한 아이들이 이룰지도.
그때도 남편은 핸드폰게임을 하겠지. 좋아하는 것을 하게 놔두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