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주차중1

by 레마누

퇴근하는 길에 아내의 차를 봤다. 큰길에서 우회전하자마자 보였다. 며칠째 같은 자리였다. 주차된 차를 지나치며 힐끔 쳐다봤다.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우연인 줄 알았다. 알면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사람이 정말 뭐 하는 짓이야? 하며 씩씩댔다. 눈에 띄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내의 물건은 대문밖에 내던진 지 오래다. 아이들을 보러 왔다 해도 우리 집 문지방 넘는 꼴은 볼 수 없었다. 혹시 나 모르게 왕래하는 건 아닌가 싶어 화가 났다. 육지에 일이 잡히면 이삼일을 나갔다. 아이들끼리 입을 맞추면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문제는 어머니인데 누워만 계신 노모는 입에 밥만 들어가면 만족하는 분이다. 5년이 넘도록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살았다. 노인네는 눈만 마주치면 죽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건가? 이번에는 때리는 것만으로는 안 끝날 것이다. 다시는 돌아다니지 못하게 다리몽둥이라도 꺾어놔야 하나. “씨발” 차에서 내리다 빈 깡통을 밟았다. 몸이 휘청거렸다. 누군가 먹다 버린 콜라 캔을 지근지근 밟으며 씩씩거렸다. 그러다 문득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어 돌아섰다. 보는 사람이 없었지만, 뒤통수가 간지러웠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방문을 모두 열었다. 어머니는 문이 열리는 줄도 모르고 코르릉 코르릉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이부자리 옆에 먹다 만 사과 두 조각과 쌀과자 봉지가 보였다.

아내는 아니다. 아내라면 어머니에게 과자를 주지 않는다. 아내는 양치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어머니가 오란다처럼 이에 끼는 걸 좋아하는 게 불만이었다. 어머니의 입에선 단내가 났다. 아내는 가제 손수건에 물을 젖셔 어머니의 이와 입술을 구석구석 닦았다. 거동이 힘들 뿐 정신은 멀쩡한 어머니는 욕을 잘했다.



아내는 오이나 당근을 깨끗하게 씻어 한입에 먹기 좋게 썰고 왔다. 어머니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오이를 씹었다. 당근은 쳐다도 안 봤다. 아내는 어머니가 남긴 야채로 저녁을 대신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조금 살이 붙은 것 같다. 그렇지만 그건 당연한 순서였다. 처녀 적에 날씬하고 예쁘지 않은 사람이 있었던가. 여자는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몸이 몇 번이나 변한다. 더군다나 경태의 아내는 딸만 넷을 낳았다. 엉덩이가 커지고 뱃살이 잡히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경태는 한 아름에 안겼던 아내도 좋았지만, 지금의 아내도 싫지 않았다. 안으면 가슴에 눌리는 아내의 보드라운 살이 편안했다. 말주변이 없는 경태는 그러나 아내에게는 “살 빼서 뭐 할 건데? 쓸데없는 짓 하고 자빠졌네.”라고 했다. 아내는 그런 경태에게 더 말할 건더기도 없다는 듯이 안방으로 들어갔다. 경태는 거실에서 티브이를 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안방은 3일 전 경태가 나갈 때와 똑같았다.

아내의 차가 집 근처에 있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셋째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마침 둘째가 전화해서 늦는다고 했다. 경태는 엄마를 만났냐고 묻는 대신 너무 늦지 말라고 말했다. 둘째가 지나가는 말로 “막내는 오늘 엄마네 집에서 잔대요.”라고 했다. 화가 뻗쳐 말이 늦는 사이 둘째가 전화를 끊었다. 아이들은 경태가 성질낼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알았다. 여자아이들이라 빠른 건지, 네 명의 아이들이 어우러져 크다 보니 그런 건지 몰라도 예전부터 그랬다.



경태는 아내와 어머니, 그리고 네 딸과 살고 있었다. 집에서 유일한 남자인 경태는 목소리가 컸고, 경태의 말이 법이었다. 가장의 권위, 남자의 자존심은 사소한 것에서 드러난다. 경태는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이, 밤에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저녁상을 차리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누리고 살겠다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이었다. 어머니는 다 늙은 아들을 여전히 고등학생 보듯 했고, 아내는 말하는 것도 귀찮다는 듯 간섭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사춘기 시절을 지나며 소심한 반항을 했지만, 경태에게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말만 청산유수에 뻔지르하게 잘하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던 경태는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가족끼리는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과 다른 말을 내뱉는 사이 아내와 아이들은 조금씩 멀어져 갔고, 경태는 언제부터인가 아내와 둘이 있으면 뭘 해도 어색했다.



아내는 말이 없는 여자였다. 스무 살 때 소개팅에서 만났을 때도 경태가 하는 말에 웃거나 맞장구를 치기만 했다. 경태는 웃지 않는 공주 앞에서 재롱을 떠는 어릿광대처럼 수다스러웠다. 남이 보면 방정맞거나 촐랑댄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경태는 여자 앞에서는 몸이 붕붕 뜨는 것 같았다. 다음 해에 속도위반으로 결혼을 했다. 경태의 친구들은 대부분 군대에 있어서 결혼식장 의자가 반은 비었다. 경태의 큰누나는 왜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냐며 투덜거렸다.



경태는 아내의 배가 더 나오기 전에 웨딩드레스를 입혀 주고 싶었다. 사글세라도 제집을 갖고 싶다는 스무 살 여자의 말이 경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누군가를 책임질 나이란 건 정해진 게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것이다. 경태는 그때 이 여자를 평생 책임지겠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모네 집에서 살고 있었다. 경태가 호프집에서 6개월 일하고 받은 돈으로 한 칸짜리 방을 얻고 소꿉장난하듯 살림살이를 샀다. 밥을 안 먹어도 살 것 같은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입덧이 끝나자 아내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어대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면 속이 쓰린 먹는 입덧이었다. 스물한 살이었던 경태는 어머니에게 결혼식을 올려 달라고 떼를 썼다. 아버지 없이 누나 2명과 여동생 한 명을 키운 어머니는 처음에는 싸리 빗자루로 경태를 때리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다음날 경태는 여자와 함께 어머니를 찾아갔다. 여자의 배를 본 어머니는 매를 드는 대신 밥상을 차렸다. 여자는 제 앞에 있는 음식들을 야무지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