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주차중 2

by 레마누

아내는 작은 얼굴에 큰 눈으로 말을 할 줄 아는 여자였다. 웃으면 오른쪽에 보조개가 깊게 파였다. 경태는 말하는 중간중간 아내의 얼굴을 쳐다보며 보조개를 찾곤 했다. 아이들을 키울 때 늘 들릴만한 큰소리나 짜증 섞인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감정의 기복이 크고, 말이 빠른 경태는 거친 말을 하고 나서 후회했는데, 아내는 그런 경태를 나무라거나 맞받아치는 대신 희미하게 웃으며 자리를 떴다. 괜히 머쓱해진 경태는 담배를 피우며 아내의 뒷모습을 좇곤 했다. 큰소리 내는 법도 없고, 화도 잘 내지 않았다.


경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돈 벌러 갔다고 했다. 경태는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올지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고등학생이 돼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경태는 교복을 입고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오락실에서 옆 학교 아이들과 싸우면서도 언젠가는 아버지가 떡하니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까지는 어머니와 누이들을 돌봐야 한다. 나는 집에 하나밖에 없는 남자다. 그런 생각을 하며 경태는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어른이 되었다.


가끔 경태는 전생에 무슨 죄인지 복인지를 지어 이토록 여자들 틈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 그러려니 했다. 연이어 둘째와 셋째가 태어나면서 경태는 점점 집에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단란주점을 차렸다 접었다. 당구장도 해 보고 스크린골프장 사장 소리도 들었지만 뭘 하든 성공하지 못했고, 오래 하지도 못했다. 어머니가 숨겨 놓았던 고향의 땅들을 하나둘씩 팔아 치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오일장에서 좌판을 늘어놓고, 쌀을 팔았다. 어머니의 좌판에는 경태가 실어다 준 곡물 포대가 가득했다. 경태가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잦아지자 어머니는 아내에게 소형차를 사 줬다. 어느 날부터인가 아내의 차 트렁크에 쌀가마니가 실렸다.


아내는 스무 살에 결혼해서 8년 동안 4명의 아이를 낳았다.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아내는 미용학원에 다녔다. 자격증을 따고 미용실에 취직한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막내가 호되게 아팠다. 경태는 집안일도 똑바로 못 한다고 소리쳤고, 아내는 일을 그만두었다.


막내는 자주 아팠다. 막내가 태어나던 날 경태는 술집에 있었다. 막내는 예정일보다 열흘이나 빨리 태어났다. 경태가 전화를 받았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졌다. 경태는 4번째인데 그런 것도 몰랐냐며 화를 내고 전화를 끊었다. 아내가 다시 전화해서 병원에 오라고 말했고, 경태는 술 냄새를 풍기며 산부인과에 도착했다. 아내는 택시에서 내리고 10분 만에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간호사가 딸이라는 말을 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내에게 괜찮다고 했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아내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 경태는 달랠 생각이 없었다.


4번째 임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경태는 내심 아내가 알아서 해 주길 바랐다. 다른 여자들은 잘도 알아서 병원을 찾아가던데, 아내는 그런 융통성도 없었다. 그저 생겼으니 낳겠다고 했다. 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 것을 망설이게 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경태에겐 이미 아들이나 딸이 문제가 아니었다. 셋을 부양하는 것만으로 이미 허리가 휘었다. 얼른 아이들이 커서 짐을 나눠 가져졌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경태는 아내가 일하는 것을 반대했다.


캄캄하고 냉기가 흐르는 집에 들어가 불을 켜는 것이 싫었다. 혼자 있으면 작은 소리도 크게 들렸다. 내의를 입고 이불을 덮어도 추웠다. 경태의 어머니는 일이 바빴다. 오일장이 끝나도 정리하고 오다 보면 저녁때가 지났다. 누이들은 어디서 뭘 하다 오는지 항상 늦게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갔다. 경태는 중학교 때는 오락실을 고등학교 때는 당구장을 집 대신 삼았다. 그곳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불이 환했다.


아내가 그래도 같이 벌어야 빨리 돈이 모이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경태는 아이들을 단단히 키우는 게 돈 버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학원 대신 집에서 공부를 시켰다. 손이 야무지고 머리 회전이 빠른 여자였다. 큰아이의 문제집을 사면 이면지에 답을 쓰게 했다. 그렇게 깨끗한 문제집은 막내가 풀 때야 문제집에 채점을 할 수 있었다. 딸만 있는 것도 돈을 아끼는 데 한몫했다. 옷과 신발, 가방 들은 항상 튼튼하고 단단한 것으로 샀다. 아내는 그런 여자였다. 알뜰하고 현명한 여자. 그런데 지금은 없는 여자.


네까짓 것 없어도 잘 살 거라 다짐했다. 너도 나 없이 얼마나 잘 사냐 두고 볼 심사였다. 오십이 넘은 여자가 돈 한 푼 없이 집을 나간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기댈 언덕 하나 없는 아내는 가방 세 개에 30년 세월을 담고 집을 나갔다.이고 지고 나가는 아내의 모습을 경태는 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엄마의 부재를 경태에게 알렸다. 가슴에 찬바람이 훅하고 들어왔다. 육지에 있던 경태가 돌아온 건 삼 일이 지난 후였다. 근처 사는 누이가 밤낮으로 드나들며 아이들과 어머니의 끼니를 챙겼다.


어머니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 잔기침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병원에 가봐야 하나 어쩌나 싶었다.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지만,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경태는 고독했다. 외로움은 불길한 감정이다. 마음이 약할 때를 기가 막히게 알고 찾아온다. 이럴 때 술을 마시면 안 된다. 술을 마시면 아내가 생각날 테고 생각이 나면 전화를 하고,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면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말을 할지도 몰랐다. 경태는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냈다. 맥주를 마시듯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목이 묵직해졌다. 컵을 내려놓고 식탁 의자에 앉아 담배를 꺼냈다.


“씨발.”

구겨진 담뱃갑 안에 반으로 잘린 담배 개비들이 있었다. 아내의 차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라 손에 쥐었던 담뱃값을 구겼다. 눈이 뒤집히면, 앞뒤 분간 못 하고 당장 화풀이 대상을 찾는 건 경태의 오랜 습관이었다. 십 분만 참아도 생기지 않을 일들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경태는 번번이 먼저 내뱉고 후회하는 삶을 살았다. 반으로 잘린 담배 개비 사이에서 잘리지 않은 것을 찾아 불을 붙였다. 살 것 같았다.


아내는 한숨을 자주 쉬었다. 어머니는 그럴 때마다 복이 떨어진다며 아내를 타박했다.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아내의 한숨 때문인 것처럼 야단을 쳤다. 아내는 어머니 앞에서는 한숨을 참았다. 참는 게 보였다. 아이들은 경태가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소리를 지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을 쳐다봤다. 경태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하는 말은 뜬금없는 투정이었고, 쓸데없는 객기였으며, 상대가 잘못된 분노였다는 것을. 경태는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일은 제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고, 남들은 차고 넘치는 돈도 경태에게만은 헤어진 연인보다 차가웠다. 공짜를 바라진 않았다. 일확천금은 아니어도 노력한 만큼은 돌아와야 하는 게 아닌가. 어찌 된 일인지 일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갔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시골 밭에 손을 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머님은 호로자식이라고 하며 온갖 욕을 퍼부었지만, 진심이었다. 어머니의 장롱 깊은 곳에 있던 밭문서는 마지막 보루 같은 거였다. 경태가 군대 갔다 온 사이 아이는 걸어 다녔고, 아내의 배는 또다시 남산만 했다. 다른 데는 살이 안 붙었는데 배만 컸다. 아내의 배 모양을 본 어머니가 이번에도 딸이라고 했다. 경태는 낳아봐야 안다고 했고, 어머니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했다.


가끔 경태는 어머니의 말이 빗나가길 바랐다. 그러나 집안의 경제권이 어머니에게 있는 이상 경태는 하고 싶은 말을 다 뱉을 수 없었다. 아내는 먹는 입덧이라 괜찮다고 하면서도 퉁퉁 부은 얼굴로 경태를 쳐다봤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했다. 첫째가 새벽에 놀라서 깬다고 하자, 시어머니는 지 어미를 닮아 예민하다고 했다. 방 세 개가 붙어 있는 오래된 단층집에서는 말소리가 크게 들렸다. 경태는 어디에 있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퇴근할 때 몇 번 케이크와 과일을 사고 와서 아내에게 혼자 먹으라고 했다. 아내는 어떻게 그러냐며 어머니의 방문을 두들겼다. 어머니는 임산부보다 많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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