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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힘

백일 글쓰기 No.12

by 레마누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미친 짓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불 같이 화를 내고 돌아섰다.

여자는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들고나갔다. 심지어 우리가 사 준 텔레비전과 엄마가 쓰던 서랍장, 싱크대 안에 있는 은박지와 비닐장갑, 숟가락, 젓가락까지 챙기고 나갔다. 우리는 분노했지만, 아빠는 좌절했다. 우리는 화를 내며 여자와 싸우자고 했지만, 아빠는 부질없다 했다. 그때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다. 정신 못 차리는 아빠에게 모진 말을 쏟아붓고 돌아서면 가슴이 아팠다. 내가 너무 아파서 아빠를 외면했다. 인연을 끊을 테니 혼자 마음대로 살라고 했다. 그날은 소주 한 병을 마셔도 잠이 오지 않았다.


계속 생각났다.

추운 부엌에서 소주를 마시는 아빠가. 밥통에서 금방 한 밥을 뜰 때면 햇반을 데우는 아빠가, 잘 익은 김치를 꺼내 김치찌개를 할 때마다 아빠가 떠올랐다. 달려가 따뜻한 밥을 해 주고 싶었다. 내가 만든 김치 맛보라고 내밀면 아빠는 잘했다고 하겠지. 커다란 손으로 등을 두들기며 이제 살림꾼 다 됐네. 할지도 모른다. 딸들의 결혼식을 세 번 치르며 아빠가 눈물을 흘렸던 건 첫째인 내 결혼식이 유일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인데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받으니 짜증 났다. 답을 몰라 쩔쩔매다가 나중에는 이런 문제를 안긴 아빠에게 화가 났다. 아빠는 엄마와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잠을 잘 때도, 밭에 갔다 와서 씻을 때도 아빠는 엄마 옆에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 모습을 당연하게 봤던 우리는 결혼이 참 좋은 거구나. 생각했다. 커다란 아빠가 엄마를 부르고, 엄마만 찾으며 살았는데,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빠는 일 년도 안 돼 여자를 데리고 왔다.


생각을 바꾸자 마음이 달라졌다.

나쁜 건 그 여자인데, 왜 우리끼리 이렇게 싸워야 돼? 그 여자에게 돈을 청구하고, 그 여자를 잡아 가둘 생각을 해야지. 꽃뱀에게 당한 멍청하고 고집 센 노인네에서 아내를 잃고 허약할 때 사기당한 불쌍한 남자라고 생각을 바꾸자 다른 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십 년 동안 아빠가 견뎠을 고독의 시간들과 어떻게든 혼자 살아보려고 했던 노력을 더듬어봤다. 아빠는 아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배갯머리송사에 넘어가 인감이든 통장이든 네가 다 알아서 하라고 한 건 분명 어리석은 일이지만 그것 또한 아빠의 모습이다.


추억은 힘이 세다

어렸을 때 아빠는 낚시 갈 때마다 "같이 갈 사람?" 하고 물으면, 나와 동생은 신나게 손을 들었다. 둘째는 어떤 날은 가고, 대부분 집에 있었다. 아빠와 낚시를 하는 건 재미있었다. 아빠는 낚시대회 수상자답게 나란히 선 아저씨들 중 제일 바빴다. 아빠는 낚싯대를 멀리 던졌고, 아빠의 낚싯줄에는 물고기들이 줄줄이 딸려 올라왔다. 낚시가 안 돼도 좋았다.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면 생각들이 자유롭게 오갔다. 바닷가에 앉아 해 지는 것을 보면 괜스레 눈물이 났다. 아빠와 함께 있으면 파도가 아무리 거세도, 비가 쏟아져도 무섭지 않았다. 아빠가 지켜줄 거니까. 아빠는 뭐든 잘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손을 내밀었다.

나쁘고 험한 말을 하고 아빠와 헤어지고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동생들에게 연락해서 명절이 되기 전에 아빠집에 가서 청소하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동생들이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어제 아이들을 데리고 아빠를 찾아갔다. 아빠. 하고 부르자 어. 하고 대답했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쉽고 간단한 말을 무겁게 했다.


그곳에 가고 싶었다.


사계 용머리 해안

아빠와 함께 낚시하던 곳 앞에 매표소가 생겼다. 친정에 갈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갔는데, 어떤 날은 만조라서 어떤 날은 파도가 세서 들어가지 못했다. 작년에 그곳을 배경으로 단편소설을 쓴 후로 꼭 가봐야지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번에 다행히도 들어갈 수 있었다. 아빠, 여기 좋아졌다. 예전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그러게. 다니기 편해졌네. 여기 앉아서 낚시한 거 맞지? 와 너무 좋다. 파도가 여기까지 들어왔었는데. 그래서 아빠랑 저 위로 올라갔잖아. 나는 갯지렁이잘못 끼웠다고 혼났어. 양동이 쏟아질까 봐 얼마나 조심해서 걸었는데, 여기 홍합 정말 크고 맛있었는데. 호미 가져왔으면 저거 따고 가서 삶아 먹고 싶다.


말이 쏟아졌다.

집에서는 못했던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13살처럼 아빠, 아빠를 불렀다. 집에서는 말을 아꼈다. 무슨 말만 하면 서로를 탓하기 바빴으니까 아예 말을 말자 했다. 밖에 나오길 잘했다. 아빠와 나란히 걷길 잘했다.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풀렸다. 마침 한라산에 눈이 쌓여 기가 막힌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빠, 25년에는 좋은 일만 생기려나 봐요. 맨날 올 때마다 못 들어왔는데, 아빠랑 오니까 이렇게 왔네. 모르지 뭐.


아빠가 사진을 찍어줬다.

사계 용머리 해안


저기 서봐. 여기 보고. 웃어야지. 하늘이 보여야 돼. 그래야 얼마나 큰지 알지. 사람이 많아도 돼. 너만 보이니까. 일행의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아빠가 내 핸드폰을 잡고 말했다. 저기 가서 서 봐. 여기가 사진이 잘 나와. 조금만 올라가서 여기 봐. 엄마의 독사진이 많았던 건 아빠 덕분이었다. 우리 집에 사진이 많은 것도 아빠 덕분이었다.


잘 모르겠다

아빠를 남겨두고 올라왔다. 오랜만에 외갓집에 왔다가는 아이들은 엄마네 동네가 좋다며 엄지 척을 해줬다. 나도 우리 동네가 좋다. 좋아서 너무 좋아서 슬프다. 아빠를 이렇게 남겨두고 가는 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감당할 수 있을지 겁이 난다. 걱정과 염려가 나를 좀먹고 있었다. 원인을 찾느라 지금에 충실하지 못했다. 글을 쓰면서도 잘 모르겠다. 아빠와의 산책으로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 상황을 바꾸는 건 내 힘으로 불가능한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떨까? 같은 상황을 두고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마음은 내가 어떻게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결론이 나왔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감사할 일이 자꾸 생긴다

더 가지지 못함에 아쉬워하기보다 이만큼 가진 것에 만족하고, 하지 못한 일을 후회하기보다 이제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멀리 있는 사람보다 옆에 있는 이에게 다정한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감사하고 고마운 사람이 많음에 감사한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다 보니 자꾸 감사할 일만 생긴다.


오늘도 제 글을 읽어주신 작가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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