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쳐버릴 수 없는 생각이 있다
엄마는 종종 서울에 갔다. 젊고 예뻤던 엄마는 서울에만 갔다 오면 핼쑥해져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는 나를 데리고 서울에 갔다. 시골에서 서울에 간다는 것은 어깨를 으쓱거릴 일이었다. 비행기 한번 못 타 본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 오렌지주스를 마셔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은 이모네 집에서 4일 정도 놀다 왔다. 엄마는 이모와 함께 나갔다 오더니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나는 한강공원에서 자전거도 타고, 사촌동생들이랑 놀이동산도 가고 신나게 놀았다. 서울은 넓고 신기한 곳도 많았고, 밖에서 조금만 놀면 목이 칼칼했다.
집에 내려가기 전날 이모부와 식당에 갔다. 갈매기살전문점이라고 했다. 서울은 정말 없는 게 없구나.
그런데 왜 갈매기를 먹지? 제주 흑돼지보다 맛있나? 아무리 그래도 손이 가지 않았다. 고기를 왜 안 먹냐는 이모의 질문에 "갈매기고기는 도저히 못 먹겠어."라고 했다.
이모부와 이모가 웃었다. 엄마도 웃었다. 그제야 엄마눈에 내가 보이는 것 같았다.
엄마는 종손집 큰며느리였다. 결혼하고 삼 년 만에 나를 낳고 줄줄이 딸 둘을 더 낳았다.
작은 슬레이트집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삼촌까지 8명이 살았다. 할머니는 한 번도 엄마에게 아들을 낳으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니다. 엄마가 막내를 낳고 일 년쯤 지났을 때 한 번만 더 낳으면 아들이라는 소리를 했다가 아빠가 술을 진탕 먹고 와서는 할머니에게 아들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집 다 부수고 나간다고 난리를 피웠다. 아빠는 평소에도 목소리가 크고, 싸움을 잘했다. 술을 마시면 더 무서워졌다. 할머니는 그런 큰아들의 성질을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엄마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우리 세 자매가 조금이라도 눈에 거슬릴 때마다
지집년이...
쓸데없는 것들이..
제사도 못 모실 것들이.
라고 말을 했는데 아빠에게는 들리지 않았고, 영문도 모르게 혼이 난 우리는 그저 아빠가 얼른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아빠는 여자들도 남자랑 똑같다며 기죽지 말라고 했다. 태권도 발차기를 가르쳐주고, 씨름도 가르쳐주었다. 남자랑 싸워서 이겨라. 여자라고 못 하는 건 없다.라고 말을 하곤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만 알았다
엄마는 내가 17살 때 아들을 낳았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는 엄마가 중절 수술을 많이 했고, 자궁이 심하게 망가졌으며, 40살에 막둥이를 낳고 바로 폐경이 왔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엄마가 허무하게 떠난 지금 생각한다.
만일 내가 아들이었다면 엄마의 삶은 조금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30대 후반쯤이었던 엄마는 그 많은 짐들을 지고 어떻게 살았는지 가늠이 안 될 때가 있다. 딸 셋만 보면 욕하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들이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도 아빠는 집에 안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말을 듣고 중절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알아보고, 제주도에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비행기를 탄다. 서울에 있는 중절전문병원에 가서 접수를 하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이름이 불릴 때까지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만일 내가 남자였다면 나는 매우 든든한 엄마의 큰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넉넉한 적금통장처럼 엄마의 등 뒤에 딱 버티고 서서 49킬로그램의 엄마를 단단히 안아줬을 것이다. 그럼 우리 엄마는 환갑도 되기 전에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았을 것이다.
내가 만일 남자였다면 우리 엄마는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