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뭐 해? 그냥 생각나서.

친구가 떠오르는 시

by 레마누

정미네

-신미나-


장마 지면 정미네 집으로 놀러 가고 싶다.

정미네 가서

밍크이불 덮고 손톱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고 싶다.

김치전을 부쳐 쟁반에 놓고 손으로 찢어 먹고 싶다

새로 온 교생은 뻐드렁니에 편애가 심하고 희정이는

한 뼘도 안 되는 치마를 입는다고 흉도 볼 것이다.

말 없는 정미는

응, 그래, 싱겁게 웃기만 할 것이다

나는 들여놓은 운동화가 젖는 줄도 모르고

집에 갈 생각도 않는다

빗물 튀는 마루 밑에서 강아지도 비린내를

풍기며 떨 것이다

불어난 흙탕물이 다리를 넘쳐나도 제네집처럼

아득한 그 밤,

먹성 좋은 정미는 엄마 제사 지내고 남은 산자며

약과를 내올 것이다



비가 오면 부침개가 먹고 싶어 진다. 자글자글 익는 소리를 듣는 것도 좋고 고소하게 퍼지는 기름냄새도 좋다. 이상하게 비가 오면 부침개가 먹고 싶어서 오징어를 사다 놓고 양파와 묵은지와 쪽파를 잘게 썰어 한 장 부쳐 먹었다. 혼자 먹으니 또 맛이 없다. 부침개는 여러 개의 젓가락이 싸우면서 먹어야 제 맛이다.


친구 중에 정미도 있고, 희정이도 있었다. 친구네 집이나 우리 집이나 좁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불 하나 깔면 꽉 차는 방에 몰려 앉으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가는 집마다 밍크 이불이 있었는데, 어떤 집은 새빨갛고, 어떤 집은 분홍색이었고, 쨍한 초록인 집도 있었다. 여름에도 비가 오면 불을 땠다. 방에 이불을 깔아 두면 따뜻함이 오래갔다. 비가 오는 날 친구네 골방에 앉아 부침개를 먹으면 집에 가고 싶지 않다. 친구가 언제 적인지 모를 제사음식을 가져오면 그것도 먹는다. 이렇게 먹다 배 터지겠다며 울상을 짓기도 했지만, 먹어도 먹어도 배는 터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친구네 집에서 먹는 건 다 맛있었다. 연탄불에 구운 김을 간장에 찍어 먹어도, 한솥 가득했던 김치찌개도 밥도둑이었다. 커다란 양푼에 밥을 떠서 둘러앉아 먹으면 배가 뽕그랗게 나왔다. 뜨뜻한 아랫목에 나란히 누워 낄낄댔다. 동네 오빠들의 근황이 제일 큰 관심사였다. 어제 버스를 기다리다 눈이 마주친 선배오빠얘기가 나오면 나도 몰래 얼굴이 빨개졌다.



하루는 웃고 다음날은 울었다. 함께 들었던 빗소리, 같이 먹었던 떡볶이와 부침개.


어제 일은 생각나지 않는데, 친구가 했던 말들이나 웃음소리는 잊히지 않는다. 사진을 찍은 것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때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다. 밍크이불 덮고 발이 닿을 때마다 소리를 빽빽 질러대던 그 옛날의 나는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건 아니다. 여전히 그때 친구들을 만나면 나는 말괄량이 수지니로 돌아간다. 각자의 자리에서 엄마로, 사회인으로 살아가다 가끔 만나면 십 대로 돌아간다. 돌아가서 딱히 뭐 하는 것도 없다. 그냥 깔깔거린다. 살아온 세월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만나면 할 말 못 할 말이 절로 가려진다.


서귀포 유동커피에서


잘잘못을 따질 일 없으니 우리가 만나면 무조건 한 팀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아군이 된다. 같이 욕하고 같이 씹고, 같이 웃고, 같이 글썽인다. 작은 골방에서 낄낄대던 그때로 돌아간다.


이상한 일이다. 친구의 얼굴에 주름이 보여도 내 눈에는 친구가 여전히 13살 같다. 서로의 흑역사를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잘난 척도 못 한다. 적당히 맞춰주고, 격려하다 돌아서면 또 제 자리로 돌아가 살아간다. 살다가 궁금해지면 전화해서 무심하게 묻는다.


내일 뭐하맨?

바쁘면 말고.


서귀포 내려간 김에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친구가 흔쾌히 시간을 내줬다. 아침 일찍 만나 커피를 마셨다. 인플루언서인 친구가 자꾸 사진을 찍는다. 이렇게도 해 보라고 하고, 저쪽도 보라고 한다. 나는 또 시키는 대로 다 한다. 집에서는 아이들 사진 찍어주느라 바쁜데, 친구는 나만 찍어준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나를 여전히 봐주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다. 몇 십장의 사진 중에 건진 사진이 있어서 좋았다. 같이 나이 들어가는 벗이 있다는 건 참 좋은 일이다.

keyword
이전 06화서로에게 배어드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