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에 대한 예의
안주철
경주 계림 앞에서
아내를 안고 있었을 때 나,
세상에서 잠깐 지워졌던 것 같다
아내는 계림을 등지고
나는 들판을 등지고 서로 안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때 우리가 등지고 있었던 것은
세상이었는지 모른다
만만하게 생각한 세상이
결코 만만하지 않아서 헉헉거릴 때
나는 아내를 사랑하면서
아내는 나를 사랑하면서
이 세상을 간신히 견뎌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와 아내가 안았던 것은 어쩌면
나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었는지 모른다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면
아내는 혀를 내밀며 아줌마가 되지만
오래전 나는 내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고
아내도 아내가 아니었을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억에 남을 시련도 없는 생을 살았다
끝까지 차례를 지켜가며 누구나
만나게 되는 불행을 겪으며 살았을 뿐이다
순서를 기다리며 불행을 겪어야 하는 생,
내 차례가 올 때까지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맞닥뜨린 시시하고 아름다운 불행들,
내 생이 저물어도 시들지 않겠지.
-내가 어떻게 담배를 끊었는지 알아?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얼굴 그대로인 친구가 21살이 된 아들을 가진 엄마가 됐다. 9명의 직원이 있는 가게를 혼자 운영하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친구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 원망스러운 마음은 없어.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니까. 30대 때 정말 열심히 노력했거든. 잠도 안 자고 고 밥 먹을 시간도 없었어. 아이 이유식도 난 못 해줬어. 된장국에 밥 말아서 먹였지. 시간이 없었으니까. 하루 벌어 하루 살았어. 사는 게 지긋지긋했지만, 아이 커가는 거 보면서 참고 살았어.
10년을 그렇게 살다더니 좀 살만해지더라. 돈이 붙은 것처럼 사업이 잘 됐어. 가게도 커지고, 그때는 또 사는 게 재밌더나. 사람 참 단순해. 곧 죽을 것 같이 힘들다가도 또 자고 나면 히죽히죽 웃는 거 보면. 그때 숙희가 나타났어.
-둘은 사랑이었겠지. 눈에 뭐가 씌웠으니까 친구의 남편이라는 것도 잊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었겠지. 친구인 나는 안중에도 없고 말이야. 헤어지면 남이라면서 날 안주삼아 둘이 낄낄댔을 거야. 상관없어. 나만 잘 살면 되니까. 술도 매일 세 갑씩 피우던 담배도 생각이 안 나더라. 그때는
- 근데 너 대단하다. 원래 그 상황이면 보통사람이면 담배도 더 피우고 매일 술도 마시고 솔직히 더 망가졌을 텐데.
-독하지?
-아니, 너무 멋있어. 너 정말 대단해. 친구야. 너 정말 멋진 여자다.
- 그때 아들이 13살이었어. 매일 이모이모 부르던 엄마친구가 아빠랑 바람난 걸 걔도 알았어. 왜 몰랐겠니. 아이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근데 난 화나고 속상하고 그런 마음보다 정신 차려야지. 하는 마음이 더 강했던 거 같아.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더라.
솔직히 나 숙희한테 정말 잘해줬거든. 돈 없다고 하면 돈 빌려주고, 일도 소개해주고, 내 딴에는 최선을 다했어. 친구끼리 서로 도우면 사는 거잖아. 그래서 그런가? 미운 것보다 그냥 인간적으로 싫더라. 걔네들이 잘 살든 말든 관심 없어. 난 그냥 내 삶을 살 거야. 잘 살라 그래. 난 더 잘 살 거니까.
친구가 나직히 내뱉은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소문으로 들었을 때는 호들갑을 떨며 숙희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다. 숙희는 나와도 중학교 동창이었다. 막상 당사자는 무덤덤했다. 연못을 휘저으면 바닥에 있던 흙들이 올라와 물이 뿌옇게 흐려진다. 흙이 가라앉을 때까지 물이 다시 깨끗해질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친구의 인생에도 한바탕 흙먼지가 일어났고, 친구는 인내하며 버텼다.
어떤 일이 닥쳐도 살아가지만 또 작은 일에도 허물어지는 게 사람이다. 안주철 시인은 누구나 만나게 되는 불행을 줄 서서 기다리는 삶. 순서를 기다리며 불행을 겪어야 하는 생. 미리 걱정하지 말고 꾸벅꾸벅 졸다가 불행이 맞닦뜨리면 화들짝 놀라고 그러면서 담담히 불행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이 시가 생각이 났다. 친구에게 보냈더니 좋으네. 짧은 답이 왔다. 이 세상의 불행이 모두 나의 것이 아니듯 불행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태풍이 지나간 바다에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