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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ll May 27. 2022

해변의 여인

바다가 종일 다가왔다.


치맛자락이 물에 젖지않게 말아쥔 채,

복희는 모르는 척 앉아 있었다.


눈물은 이미 마른 후였다.


긴 밤을 뒤척였지만

그를 돌아세울 방법은 없었다.


파도 끝이 그리고 또 그리는 선 같이

복희의 마음에는 줄곧 다른 말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의 웃음, 그의 단단한 팔, 그의 머리칼, 그의 친절한 말투,

무엇보다 그의 단단한 팔과 그 온기,

그리고 거칠지만 섬세한 손가락,

그리고


복희는 모래밭 여기저기 작은 숨구멍이 송송 드러나는 것을

그저 바라보았다.


그 안에 아주 깊거나

또는 의외로 얕은 어딘가에 틀어박혀

갈매기나 게 따위를 피해 꾸물꾸물 살고 있을

조개를 바라보았다.


복희가 그를 좋아한 것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 여름 바다에 왔고

낡았지만 깨끗한 트럭을 바닷가 민박에 세우더니 방을 얻었다.


그리고 그는 어제까지 그 방에 머물렀다.


아주 단단히 틀어박힌 조개처럼

아주 단단한 그의 팔뚝


복희가 동네에 하나뿐인 철물점 앞에서 끝이 나지 않을 실갱이를 벌이고 있을 때

그는 라디오 노랫소리처럼 스윽 들어와 마당용 빗자루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철물점 아저씨가 잔돈을 건네주자

그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동전 몇 개와 지폐 한두 장이 올라앉기에

그의 손은 지나치게 넓어보였고

그의 팔은 쓸데없이 단단해보였기에


복희는  공연히 얼굴을 붉혔다.


그 후 며칠 동안 복희는 철물점과 민박집 사이를 거닐며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옛시조를 떠올렸다.

이미 난 길 위에 새 길이 나기 전에


복희는 그가 한영감님 댁 마루 끝에 앉아 누렁이를 어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새로 시작되었고

그가 어망을 널어 말리는 방둑 앞에서 운동화 끈을 매고 있을 때

또 다시 모든 역사가 처음부터 쓰였다.


세 개의 계절을 지나는 동안

복희는 그와 무수히 연애하고 그를 위해 새 치마를 사고 그의 저녁식사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아직 다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트럭이 아직 동네 어귀 슈퍼 앞에 있었고

그는 맹이 아주머니네 수도를 고쳐주고 있었다.


트럭에는,

하지만 그의 가방이 올 때처럼 실려있었고

민박집 장씨는 이불이란 이불은 죄다 꺼내어 털고 있었다.


그는 떠난 것이다.

이미

그가 철물점 앞에서, 면사무소 뒷길에서, 분교 앞 횡단보도에서 복희의 발개진 얼굴을 가벼운 걸음으로 스쳐 갔을 때 이미

그는 몇 번이나 그녀를 떠났다.


조개가 보이지 않는 해변처럼

복희는 그의 연심도 줄곧 뽀글뽀글 솟아오르고 있으리라고

그래서 어느 물결엔가 둥둥 떠올라 덥석 마른 모래에 안길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가오는 것은 바다 뿐이었다.


백사장 여기저기 뒹구는 조개껍질들 사이에

복희도 닳고 쪼개지고 작아져서는


치맛자락만 꼭 쥐고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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