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4세와 7세 아이를 공동육아어린이집에서 키우는 부모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1년에 최소 한 번 이상, 많을 때는 서너 번까지 어린이집에 들어가 하루 일과를 같이 할 기회가 주어진다. ‘교육아마’라고 부르는 이 기회를 통해 나는 지금껏 수차례에 걸쳐 내 아이와 다른 아이들, 교사들이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날것으로 마주할 수 있었다.
부모 손을 잡고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아이들의 ‘스스로 하기’ 학습은 시작된다. 가방을 열어 오늘 하루 갈아입을 옷가지를 꺼내 자기 바구니에 넣고 수건을 가져다 화장실 수건걸이에 건다. 손을 씻고, 나들이용 물통에 물을 채우고 가방까지 바구니에 넣고 나면 아침 정리가 끝난다. 오전 간식을 먹고 나면 나들이 나갈 준비를 한다. 모자, 물통, 날씨에 따라 우비와 장화, 우산을 챙기기도 한다. 때로는 루페(학습용 돋보기)를 챙기거나 잠자리채 등을 가지고 나가기도 한다. 이 모든 짐들은 20~40분 거리의 나들이터에서 돌아올 때에 직접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어린이집에 돌아온 후에는 더러워진 옷을 벗고 때로는 샤워까지 하고, 낮잠 옷을 꺼내 입은 후에 점심상에 식판을 놓고 밥을 배식하거나 반찬을 가져가는 것도, 다 먹은 그릇을 거두어 부엌에 돌려놓는 것도 아이들이 직접 한다. 상을 치우고 매트와 이불을 꺼내 깔고, 자고 일어나 다시 개고, 집에 돌아갈 옷으로 갈아입고 하루치 빨랫감을 가방에 넣는 것도 아이들의 몫이다. 정말로 아이들 스스로 전부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연습이고 학습이다. 그러니 종일 교사의 손은 바쁘고 교육아마로 보내는 하루는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7세 아이를 키우고 있거나 키워봤다면, 정말로 이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이를 몇이나 알고 있는가? 4세부터 스스로 학습을 중요하게 가르치는 공동육아라 해도 7세에 이 모든 과정을 (샤워까지) 혼자서 전부 해내는 아이는 하반기에 들어선다 해도 많지 않다. 할 수 있다 해도 계속해서 교사의 채근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꺼낸 색연필은 자기가 넣자,” “이 양말 누구 꺼니?” “가방 챙긴 사람은 모둠하러 들어와 앉아야지.”와 같은 말이 하루 종일 들린다. 차라리 해주고 마는 편이 속이 시원할 것 같지만 그래도 목이 아프도록 일러주고, 알려주고, 도와주고, 기다려 준다. 이유는 단 하나다. 지금 이 나이가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7세, 그러니까 보육연령 만5세는 하루 일과를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주된 발달 목표이다. 내 물건을 챙기고, 스스로 먹고, 스스로 씻는 것이 이 아이들의 업이라는 말이다. 왜 다른 연령이 아닌 7세여야 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6세에는 아직 글을 익히지 못한 아이가 대부분이다. 사교육 업체에서는 더 빨리 가르치면 아이들이 더 빨리 글을 뗄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한글교육 프로그램은 2세부터 시작하든 5세부터 시작하든 7세까지 이어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왜냐하면 기호와 법칙, 의미와 상징을 연결시켜 언어로 기능하게 하는 뇌의 기능이 발달하는 시기가 있기 때문이며 손의 소근육이 발달하여 연필을 잡고 작은 획으로 이루어진 모양을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는 성숙의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 이름과 책의 제목을 읽을 수 있어야 정리라는 것을 할 수 있고 요일과 시간 개념을 알아야 일과 규칙대로 움직일 수 있다. 추상적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의사소통에 무리 없이 활용할 수 있으려면 또한 이 시기에는 도달해야 한다.
물론 아이들의 발달에는 개인차가 있다. 7세라고 해서 모두 이 정도를 해내는 것은 아니고, 6세라고 해서 모두 이만큼을 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교육, 혹은 보육의 공간과 서비스를 어른의 사정에 의해 어느 정도는 연령별 구획을 지어 제공해야 한다면 그것은 빠른 발달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느린 발달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이 질문을 길게 풀어하면 이런 뜻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지금 당장은 신체 및 지적 발달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기준에 맞추어 인생 초기부터 좌절감을 느끼도록 부추겨야 할까, 아니면 작은 성취부터 느껴가며 스스로의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할까? 다르게 말하면 이런 질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감정과 관계에 대한 대처능력을 채 갖추지 못한 나이에 경쟁과 우월감, 시기심과 굴욕감을 가르치는 줄 세우기는 몇 살부터 해야 할까? 적절한 수준의 도전, 그 도전을 이루어내는 과정에서의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좌절과 그것을 극복하는 쾌감에서 오는 자기긍정을 주며 기다려줄 수는 없는 걸까? 어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잔혹한 법칙이 과연 우리의 행복에 기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랑스럽게 그 법칙들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가?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심리적이거나 신체적인 준비와 상관없이, 그저 ‘보다 더 빨리 배우면 더 잘 배우더라’는 이미 반박 당한 연구결과 몇 개와 출산율, 경제진입연령과 같은 ‘어른의 사정’ 때문에 그것들을 얼른 후딱 물려주는 것이 어른의 역할인가? 이런 생각을 가진 어른들이 정책을 만드는 나라에서 청소년 자살률이 세계 1위인 것은 우연일까?
도입부에서 말한 거의 모든 미션을 스스로 해내는 내 7살 딸은 아직 대변을 보고 뒤처리를 혼자 하지 못한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급식 먹는 시간이 짧아 밥을 거의 먹지 못하고 귀가하는 아이나 화장실을 혼자 사용하는 것이 두려워 (혹은 더 큰 아이들이 드나들기도 하는 공용화장실이 낯설어) 6년 내내 집에 와서 대변을 보는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한다. 중학생이 다 되도록 알림장을 부모가 써주거나 숙제나 학원 스케줄을 부모가 관리하는 것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흔하다. 이렇게 스스로 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은 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스스로 그 배움을 만들어내지 못한 아이들의 책임일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 아이들을 교육기관에 밀어 넣어 스스로의 책임을 다하도록 다그치는 것이 맞다. 아니면, 아이들을 믿고 아이들에게 맡기지 못하는 부모의 책임일까? 그렇다면 역시 그 부모에게서 아이들을 떼어내어 교육기관에 밀어 넣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교육기관에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일을 하는 법을 가르치는 교사가 없거나 그러한 교육내용, 프로그램이 없거나, 아이들의 체형, 발달정도에 맞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거나,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발달상황을 고려하기에는 연령별 교사 대 아동 수가 지나치게 많거나, 하루 일과의 흐름 중 아이들이 무언가 스스로 결정하고 실천할 기회 자체가 거의 없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학교가 이 모든 것을 담당해야 할 곳일까? 학교가 이 책임을 가져간다면 실질적으로 그 책임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가 될까?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임용자격시험을 통과한 교사들이 현재 8세부터 13세까지의 일과를 책임진다. 여기에 7세가 들어가면 교사들은 12세에게 선거가 무엇인지 가르치다가 다음 해에는 7세 아이의 대변 뒤처리를 위해 화장실 밖에서 휴지를 들고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학교’라는 주체는 정책의 대상이 될지 몰라도 아이들과 현장에서 일과를 보내는 것은 교사다. 발달단계가 고려되지 않은 채로 한 반에 스무 명씩 몰려드는 아이들에게 수업시간 동안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교사다. (참고로 만 5세 아동의 평균 집중 가능시간은 12분 정도라고 한다. ‘평균’이라는 단어를 어설피 보아 넘기지 않는다면 만 5세 스무 명이 의자에 앉아 칠판을 보고 있어야 할 때에 어떤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의 사정’이 정말 긴요하여 아이들에 영향을 미쳐야만 한다면, 이것도 생각해보자.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나의 경우 매일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6시 반까지 이다. 나는 일하는 엄마이고, 첫째를 낳기 한 달 전에 휴직하여 이후 그 일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법도 도덕도 내게 일을 돌려주지는 않았고 간신히 첫 아이의 모유수유가 끝나기도 전에 하루 3시간의 일을 하게 되었지만 길게 유지되지는 못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일을 하러 가 있는 엄마의 빈자리로 인해 아이는 불안과 퇴행을 겪었다. 마침내 아이의 분리불안이 끝나고 다시 직업을 가졌으나 본격적으로 그 일에 매진해보려 하자 둘째가 생겼다. 그리고 다시 반복. 마침내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하루를 온전히 보낼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야 정규직 일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내년에 첫째가 학교를 다니게 되면 초반에 잠시 적응기 동안 육아기 탄력근무를 이용한 후 나의 커리어를 돌볼 예정이다. 적어도 8세는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학교 끝난 뒤에 횡단보도를 이용하여 길을 건너 초등방과후까지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 속에 세운 계획이다.
만일 내 아이가 첫 등교를 하는 날의 키가 110cm를 넘기지 못한다면, 나는 내 아이가 혼자 횡단보도를 건너는 것을 염려하지 않고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까? 놀이공원 롤러코스터를 타는 키의 기준이 120cm 정도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부분 어른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는 시설물들은 최소 120cm의 키는 되어야 이용이 가능하게 만들어져 있다. 이는 롤러코스터와 같은 특수한 경우만이 아닌 화장실 좌변기, 육교의 계단 한 칸의 크기, 계단 손잡이의 높이, 자동차 범퍼 높이도 마찬가지이다. 어른은 다리나 부러질 사고에서도 아이는 내장파열이나 두개골 손상을 겪을 수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 이것은 단순히 몸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즉, 몸이 작고 추상적 개념에 대한 (예를 들어 교통신호라거나) 이해가 부족한 어린이가 혼자 등하교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참고로 7세 여아의 12월 평균 신장이 120cm이다. 개인차를 고려할 때 8세도 결코 안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더군다나 현행으로는 8세 1학년 아이들도 밥을 먹고 나면 오후 일과가 없이 학교 정규 수업이 끝나버린다. 그런데 7세에게 오후 수업을 만들어 줄 리는 없을 것이다. 결국 한 공간에서 안전하게 하루를 보내는 대신 교실에서 방과후 교실, 거기서 다시 학원이나 외부의 방과후, 또는 지역아동센터나 다함께돌봄센터로 이동하는 하루를 보내야만 한다. 현행 초등돌봄이 절대적인 정원부족과 상대적인 프로그램 빈약으로 상당수의 초등학생들을 사교육 기관을 전전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반영할 때, 아직 화장실 좌변기를 사용하기 위해 털썩 앉는 것이 아닌 끙차 기어올라야 하는 아이가 하루에 머무르게 되는 공간과 서로 다른 위치의 화장실 개수가 몇 개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내 아이가, 과연 집에 올 때까지 편하게 앉아 대변을 보고 속옷에 더러움을 묻히지 않고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런 현실적인 걱정에 파묻히는 부모가, 직장생활을 고집할 수 있을까? 현재의 육아휴직제도와 그 이용실태를 미루어 보아 이런 걱정에 파묻히거나 직장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과연 남성일까, 여성일까.
내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내 커리어를 또 다시 절단 내려 하는 황당무계한 정책이 아니다. 그래, 정책입안을 하는 사람이 모두 ‘교육아마’를 해볼 수는 없겠지. 아동발달에 대해, 일선 교사의 고충에 대해, 부모의 일가정양립에 대해 전부 겪어 알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위치에 올라가지 못하니 말이다. 최선을 다해 그 부족함을 이해해본다고 했을 때, 온 힘을 다해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려 노력한다고 했을 때, 그럼에도 내가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은,
‘초등입학연령’이라는 문제가 얼마나 많은 변수와 엮여 얼마나 많은 영향과 부작용을 낳을지를 계산하기에 앞서 바로 그 당사자인 ‘초등입학생’의 ‘나이’와 관련된 결정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정말로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애당초 초등입학생의 나이가 고려의 대상이 되어 그것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정책적인 문제 상황이 발생한 것이 아닌데, 다른 어떤 목적이나 이념에 초등입학생, 그러니까 겨우 일고여덟 살의 어린이들의 삶을 좌지우지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고의 파시즘적인 면모에 나는 분노하는 것이다. 마치 동의와 대가 없이 뙤약볕 아래 어린아이들을 잔뜩 동원하여 깃발과 꽃을 흔들게 하며 그것이 ‘체제’와 ‘이념’에 대한 ‘헌신’이라고 믿는 북쪽의 어느 나라와 무엇이 다른가. 지금의 정권이 신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생산과 결과를 위한 최고의 효율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을 보다 경쟁력있게 키우고 부모들이 더 많은 아이를 낳고 빠르게 사회에 복귀하게 하기 위해 지금과 같은 정책을 생각해 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한번 대답해보길.
아이의 이른 입학으로 집에서 애나 하나 더 낳으며 그 아이들 모두 얼른얼른 학교나 보내버리고 일하지 못하는 엄마는 무슨 돈으로 애를 키워야 하는가. 경제적 여유 없이 아이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인가. 그렇게 도태되는 가정의 아이들을 학교가, 교육부장관이, 대통령이, 국가가 책임져 줄 것인가. 10대에 생을 포기하는 아이들의 수가 아직도 부족한가.
아니 그래서 도대체, 내 둘째가 초등학교에 7세에 입학해야 한다면, 내 아이 똥은 누가 닦아줄 것인가.
(이 글은 한겨레 베이비뉴스 기고를 위해 썼으나
다소 표현이 거칠고 과격한 부분을 다듬어 기고하기로 결정되어
낳은 그대로의 내새끼에 대한 철없는 집착으로 여기에 올립니다.
분노가 알알이 묻어나는 초고를 버리지를 못하니 글이 늘지 않겠지만.. 그게 또 저인걸 어쩌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