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덕근 Aug 28. 2019

백팩을 사달라고 품의서를 올렸다

회사에 입사했을 때 받은 노트북이 있다. 그런데 이 노트북이 워낙 내구성이 약한 건지 화면에 멍이 들었다. 눌림이 심하면 생기는 거라고 수리센터에 계신 분이 설명해 주었다. 수리비용은 무려 79만 원. 서비스 기간이 아직 1년이 넘지 않았는데 왜 무상으로 안 되는 것이냐, 가방에 넣고 다닌 건데 눌려봤자 얼마나 세게 눌렸다고 이런 멍이 드는 것이냐 말해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이 현상은 무조건 고객 과실이라고. 듣는 나도 기가 찼지만 더 이야기해봤자 의미가 없을 거 같아 그냥 나왔다.


멍든 부분이 다행히 화면에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 그러려니 넘어가기로 했다. 정 불편하면 그때 다시 고치면 비용은 동일할 것이니 그때 고치면 되었다. 다시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여태껏 써온 가방을 쳐다봤다. 지금 쓰고 있는 가방은 샤오미 비즈니스 백팩으로 2만 원 정도의 물건이다. 사용한 지 어느덧 3년 정도 돼가는 가방이다. 저렴한 가격에는 가지고 다니기 좋았으나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더 좋은 가방으로 바꿔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저렴한 가방이다 보니 매다 보면 불편한 것도 있었는데 이참에 좋은 백팩으로 바꾸면 좋겠다 생각이 들었다.


# 백팩을 사달라고 품의서를 올렸다


내 업무는 24시간 돌아가는 서버를 개발 및 운영한다. 서비스가 24시간이라는 것은 내가 자고 있는 시간에도, 출퇴근하는 시간에도, 밥 먹는 시간에도 계속 돌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서비스에 문제가 생길 때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문제가 업무시간에 생기면 대응이 원활하지만 퇴근하거나 주말에 생기면 주변에 노트북을 열어볼 공간을 찾는다. 없으면 커피숍이라도 들어간다. 전에는 집에 가는 길에 문제가 생겨 중간역에 내려 역내에 있는 의자에 앉아 대응한 적도 있다. 24시간 서비스라는 게 예상한 것 이상으로 피 말리는 서비스라는 걸 깨달아 가는 중이다.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꺼낼 때도, 주말에 카페에 앉아있다 노트북을 열 때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노트북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가능한 대처였다. 만약 내가 노트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상황에 따라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심각할 때엔 회사에 다시 들어가서라도 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지방에 있다면? 그날에 도저히 도착할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면? 당연히 서비스는 계속 문제를 일으킬 수 있으며 내가 회사에 출근할 때까지 고객에게 불편한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할 것이다.


때문에 나는 말하기까지 많이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진행하는게 좋겠다 싶어 품의서를 올릴 거라고 팀장님께 말씀드리고 작성하여 올렸다.



# 누구를 위해 백팩을 사달라고 한 것일까


누군가 보면 개인적인 용무로 사달라고 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백팩 같은 건 그냥 개인 돈으로 사는 게 낫지 않아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도 어느 정도 일리는 있다. 가방이라는 것이 하나 정도 있어서 나쁠 것도 없고 어찌 보면 개인용품 수준으로 쓰일 물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의서를 작성했다.


사실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것은 내 개인적인 용무와 회사의 이익이 합쳐진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내가 노트북을 가지고 다닌 덕분에 즉각 대응이 가능했다. 설령 그 비율이 내가 노트북을 쓰는 전체 비중에 비해 10%도 안된다 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하고 해결해주는 그 순간을 돈으로 치환하면 충분히 높은 가치를 매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편의점에 가면 막걸리 1병을 2000원 아래로 살 수 있지만 산 꼭대기에서 파는 막걸리 1잔이 10,000원씩 하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고 금액이 달라질 수 있다. 나는 회사의 일을 근무 외 시간에 자발적으로 봐준 것이기 때문에 요구할 수 있는 권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노트북을 가지고 있었기에 일하는 시간 동안 풀리지 않던 문제, 혹은 '이런 것이 있으면 편하겠다' 싶은 것을 카페에 앉아, 혹은 집에서 몇 시간씩 만든 적도 있다. 이것 역시 좋은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내 개인적인 욕심과 그 자리에 노트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업무시간 내에는 그날 해야 할 일만으로도 벅차다. 하지만 주말이나 휴일에 카페에 앉아있다 보면 여유가 생겨인지 '이런 것도 좀 해둘까'라는 생각에 노트북을 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진행한 서브 프로젝트가 몇 개 있는데, 그때 만들어둔 덕분에 예전에 비해 더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 회사가 나를 평가하듯 나역시 회사를 바라본다


군대에 가면 저마다 내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한다. 어쩌면 저 위의 상황도 내가 굉장히 많은 일을 하는 것처럼 부풀려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나는 주말이나 퇴근 후에도 한 달에 1~2회꼴로 무료로 일을 해주고 있는 샘이다. 거기다 시스템 개선을 위해 적지 않은 개인적인 시간을 할애하면서 만들었으니 실상 따지면 더 많은 것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노트북을 여는 순간 그 공간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으로 만드는데 익숙하다. 어찌 보면 나는 디지털노마드처럼 노트북 하나만 열면 웬만한 일은 대부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되어 왔고, 그 습관들을 살려 회사와 개인에게 도움될만한 서브시스템을 여럿 만들 수 있었다. 때문에 10~20만 원 호가하는 노트북 가방의 가격은, 내가 언제든 최적의 환경을 조성할 수 있게끔 도움을 줄 가치에 비해 매우 저렴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회사에서 백팩을 사주지 않는다면? 그래도 상관없다. 이전 가방에 들고 다니던가 아니면 안 들고 다니면 그만이니까. 대신 회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의 행동에 대해 어떤 가치를 공감하고 지원해주는지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휴일에도 일을 해야 하는 모습에 누군가는 측은하게 볼지도, 누군가는 내가 워커홀릭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저 최적의 효율성을 갖기 위한 일환으로 했을 뿐이다. 업무시간 내에 해도 되지 않겠냐 라고 조언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나 떠오름은 순간이며 빠르게 만들어 빛을 보게 해야 한다. 한두 개는 보잘것없더라도 그 한 두 개가 쌓여서 지금의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일조했다. 만약 그때 내 손에 노트북이 쥐어져 있지 않았다면 적게는 20%, 많게는 50% 이상 업무 지연화가 되었을 것이라 장담한다.


그들은 과연 내가 올린 품의에 사인을 해줄까? 아니면 거절할까?




함께 보면 좋을 글:

https://brunch.co.kr/@lemontia/49

https://brunch.co.kr/@lemontia/14

https://brunch.co.kr/@lemontia/53


작가의 이전글 나도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