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에게 맞는 일일까?'.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스스로에게 던졌을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의 답은 쉽게 얻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불안함,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문-답 형태의 것이 아니기에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답을 알 수 밖에 없다.
나는 개발자가 적성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지금도 종종 개발자가 적성인 거 같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난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훨씬 많고, 나의 생각과 사고의 방식은 기술보다는 인문학적 접근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한때는 그런 이유로 다른 직업을 알아볼까 생각하며 책을 열심히 봤다. 1년에 150권까지 읽으면서 다른 일이 있나 기웃거리기도 했지만 전환에 실패했고 여전히 개발자 일을 하고 있다. 그런 내게 '개발자 일이 적성이신 거 같아요'라는 말을 들으면 여전히 나는 어색하다.
그러나 그 노력이 의미없진 않았다. 오히려 깨달은 게 하나 있었는데, 내가 무엇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응용하느냐가 훨씬 중요하단 걸 알았다. 내가 읽은 책의 대다수는 인문학에 관련된 책이었는데, 덕분에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올라갔다. 정확히는 방법론, 철학, 만들고자 하는 것들과 그 연관성을 보다 잘 파악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문해력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관련 책을 위주로 봤다면 보다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쩃든 지금의 나는 그렇게 되었다.
기술 외 책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해보니 개발자로서의 직업이 내게 가장 잘 맞는다는 걸 알았다. 이미 어느정도 경험이 쌓였고, 앞으로 더 많은 경험을 잘 쌓을 준비가 가장 잘 되어있던 것도 개발자로서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개발자로서 당분간 더 일을 해도 괜찮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다행히도 요즘은 개발자가 먹고사는데 괜찮은 직업이 되었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해보고 난 뒤에 결정하는 것이 좋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경험하는 것에 질적 향상이 있어야 한다. 내게 맞는 것을 찾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그 경험을 깊게 해 볼 각오가 필요하다. 노래를 한두 번 해보는 것으로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지, 가수로 데뷔해도 될지 아닌지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직업에 대한 경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다양하게 해 보는 것과 동시에 찐하게 해봐야 하는 것이다.
이윽고 엘리트가 되는 이들을 보면, 대개 초기에는 훗날 자신이 전문가가 될 바로 그 종목에서 신중한 훈련에 쏟은 시간이 사실상 더 적었다. 대신에 그들은 전문가들이 〈샘플링 기간〉이라고 부르는 시기를 거친다. 대개 체계적이지 않거나 체계가 엉성한 환경에서 다양한 스포츠를 경험하는 기간을 말한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그들은 몸을 쓰는 기술들을 폭넓게 습득할 수 있다. 또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알게 된다. 그런 뒤에야 그들은 한 분야에 집중해 기술을 갈고닦을 준비를 한다. 개인 스포츠 종목의 운동선수들을 연구한 한 논문은 제목에서 〈늦은 전문화〉가 〈성공의 열쇠〉라고 단언했다. 또 다른 논문의 제목은 이러했다. 「단체 스포츠에서 최고가 되는 법: 늦게 시작하고, 집중하고, 단호해져라」. - <늦깎이 천재들의 비밀>
경험의 질을 높여야 내가 원하는 것을 찾는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확신을 가져야 온전히 집중하여 기술을 갈고닦는다. 어설프게 하면 미련이 남고, 미련은 의심을 만든다. 의심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많은 생각은 행동을 주저하게 만든다. 때문에 확신이 들 정도로 깊게 해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 확신이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불필요한 가지를 쳐주는 가위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때문에 적성 발견 이유로 빨리 시작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얼마나 밀도 있는 경험을 했느냐가 큰 자산이 된다. 때문에 '이미 늦은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장 생각을 접고 지금 하는 것에 후회가 들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해보자. 그러고 나서 판단해도 늦지 않다. 어설픈 경험으로 똑같은 일만 반복되는 게 오히려 시간낭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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