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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나 Mar 03. 2019

낚시

낚시 가자는 J의 말에 군말 없이 따라나선다. 낚시를 좋아하진 않지만, 풍경은 좋아한다. 풍경을 즐기기에 낚시만한 것도 없다.


민물낚시라면 철마다 색다른 산이 눈을 즐겁게 하고, 산세 따라 굽이 흐르는 강물이 마음에 평온함을 준다. 한결같이 잔잔한 수면에 그려지는 반영은 한 폭의 명화 앞에 선 듯한 감상에 들게 한다. 화폭으로 쏟아지는 바람의 입자들은 도시의 소음에 지친 청각에 청량감을 준다. 한적한 허공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낚싯줄의 궤적, 그 가느다란 선에 깃드는 할레이션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 속에 있는 듯한 착각도 든다.


바다낚시라면 수평선까지 뻗어가는 탁 트인 시야에 가슴이 뻥 뚫린다. 해안가에서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먼지 쌓인 고막이 뻥 뚫린다. 비린 내음 머금은 바닷바람은 내 몸의 작은 윤곽을 새삼 확인시켜주고, 하늘과 바다 전체를 불사를 듯한 노을은 숨이 턱 막히는 감동을 준다. 물고기를 잡겠다는 건 어쩌면 그럴듯한 핑계일지 모른다.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전에 호젓하거나 드라마틱한 풍경 속에서 이미 오롯이 행복하다.    


경천 저수지로 가는 길에는 가을이 완연하다. 어느 때보다 깊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소실점에서 줄줄이 달려오는 가로수들은 노랑과 빨강으로 물들었다. 성급한 갈잎들은 벌써 길바닥을 뒹굴다 라떼 거품처럼 갓길로 모여들고, 담배를 태우기 위해 살짝 열어놓은 창틈으로 쏟아지는 바람의 체온은 이미 여름을 떠나온 지 오래다.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지긋지긋한 폭염의 나날도 어느새 저만치 물러난 걸 실감하니 세상에 영원한 건 없고 이것 또한 지나간다는 진부한 아포리즘이 뇌리를 스친다. 포인트를 물색하다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고 물가로 가서 간단한 채비를 마친 후 낚시를 던진다. 가짜 미끼를 사용하는 루어낚시다. 월요일이어서 그런지 인적이 드문 물가는 고즈넉하다. J와 내가 던지는 루어가 수면에 닿을 때 촘방-하는 작은 소리만이 소동의 전부다.


낚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와 달리 아버지는 낚시광이었다. 일을 쉬는 여름 한두 달을 내내 물가에서 살 정도였다. 심산유곡에 적을 두고 일하던 아버지는 많아야 달에 한두 번 집에 왔다. 달에 스물여덞아홉 날 나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그래서 나는 여름을 사랑했다. 한여름을 나기 위해 집에 왔지만 집에 없는 아버지가 그리워서 나는 매일같이 물가에 갔다. 아버지가 있을 법한 예상 후보지 몇 곳을 둘러보다 내 키를 훌쩍 넘는 잡풀 너머로 아버지의 실루엣이 보이면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막상 아버지 앞에 서면 오랜만의 만남이 어색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뚱한 얼굴로 말없이 아버지 옆에 앉아 있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왜 집에 오지 않는지 왜 놀아주지 않는지 그런 물음은 가슴에 꾹꾹 눌렀다. 어렸음에도 왠지 아버지를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니,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유일한 유산으로 물려받은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는 산판일을 선택했다. 무거운 기계톱을 들고 하루에도 열댓 번씩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내려야 하는 고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기계톱 결함으로 부상을 입거나 나무 위에서 잔가지가 떨어져 다치는 일이 잦았다. 한 번 산에 들어가면 여간해선 집에 올 수 없었기에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였는지 결혼생활은 파국으로 치달았고 아이 둘만 남았다. 새로 아내를 맞았지만 생활의 불안정은 여전했다. 당신에게 그토록 엄혹했던 풍진 세상살이의 대극에 있는 곳이 물가였을 것이다. 곡진한 세상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유일한 피안이 낚시였을 것이다. 낚시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이 미칠지도 모른다고, 당신마저 나를 떠날지도 모른다고 어린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었던 것 같다.


드물게 만나는 아버지 곁에 언제까지라도 붙어 있을 줄 알았지만, 아이는 아이였다. 나는 곧 지루해졌고,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고추잠자리도 잡아보고 풀잎으로 풀피리를 불어도 보지만 이내 따분해졌다. 무료한 시간을 견디는 데 한계가 오면 처음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가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났다. 보란 듯이 집을 향해 휘적휘적 걸었다. 걷다가 돌아본 아버지는 무심한 듯 지렁이를 갈아 끼고 낚싯대를 새로 던졌다.     


몇 번 자리를 옮겨보았지만 입질 한 번 없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물고기들도 놀라 물속 깊이 몸을 움츠리고 있는가 보다.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간다. 산의 그림자가 수면에 영역을 넓힌다. 그림자의 면적으로 저녁이 차오른다. 서산 능선에서 뻗치는 햇발은 7시를 향하는 시침처럼 공중으로 떠오른다. 햇살의 온기가 빠르게 식어가는 바람에서는 벌써 삭풍의 냄새가 난다. 만나자마자 이별이라더니 가을이 저무는 저수지의 정경에 겨울의 예감이 깃든다.


J와 마지막 낚시를 던진다. 역시 감감무소식이다. 오늘은 영 허탕이다. 낚시를 접고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문득 사는 일이 낚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낚을 건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흐르는 강물 같은 시간의 수면으로 한 번 던져보는 나의 생. 어느 날엔 월척을 잡기도 하지만 그것이 오로지 나만의 공로는 아니고, 어느 날엔 내내 허탕을 치기도 하지만 그게 꼭 나의 부족함 탓만은 아닌 낚시는 그렇게 우리네 인생과 통하는 면이 있다는 기특한 생각. 오늘의 허탕이 나의 실책만이 아니라 지나치게 시퍼런 하늘 탓이고,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이고,  쓸쓸한 바람 탓이고, 식탐을 내려놓은 무념무상한 물고기 탓이고, 기타 등등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체념이 된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한다.


아버지도 어느 날엔 월척을 잡았지만 몇 날 며칠 허탕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낙담하는 경우가 없었다. 꿋꿋이 낚시터를 지켰다. 마치 낚시의 목적이 물고기가 아니라는 듯이. 물가에 있는 시간과 공간 그 자체라는 듯이. 그런 아버지를 보러 다음 날도 어린 나는 물가에 갔다. 이튿날엔 어색함이 조금 누그러져 제법 재잘거렸다. 전날의 침묵이 미안했던지 아버지도 그날은 내 말을 들어주고 이것저것 묻기도 했다. 다음 날은 더 많은 말들을 나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상상으로 가슴이 풍선처럼 부풀곤 했다. 물가에 가는 길이 점점 가벼워지고 가까워졌다. 유년의 몇 번의 여름, 낚시터에서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조금씩 알아 가고 친밀해질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버지 낚시의 가장 큰 월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도 아버지의 강가에서 함께 낚시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내 쪽으로 조금이라도 끌어당기라고 아버지를 향해 낚시를 던졌던 건 아닌지.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J는 손맛 한 번 못 봤다고 연신 애석해한다. J의 아쉬움에는 가이드로서의 미안함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데려왔는데 물고기 구경은커녕 손맛도 못 보여줬다는 자책이 있을 것이다. 낚시인들 사이에는 그런 게 있는가 보다. 하지만 나는 오늘의 허탕이 좋다. 오가는 길목에서 만난 만추와 저수지의 풍경들, 친구와 함께한 고요한 시간, 거기다 한동안 잊었던 아버지와의 추억으로 가득한 이 허탕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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