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이름은 Tom
드디어 스페셜리스트를 만나는 날. 잔뜩 긴장한 채 남편 손을 꼭 잡고 병원을 찾았다.
Tom은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조금은 늙고 배가 나왔지만 확신에 찬 표정이 엄청 밝은 영국 신사였다. 나에게 지금 내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 바를 설명해 보라고 해서 쭉 이야기 했더니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며 폭풍 칭찬이다. 그럼 내가 밤마다 얼마나 공부를 했는데...
그리고 나서 계속된 Tom의 포인트는, 이 병은 치료가 가능하니 너무 걱정 말라는 것.
어찌 된 일인지 이날 Tom이 가지고 있는 CT 결과에는 내 종괴가 6.8 cm였다. 이 수치는 이 날 이후로 몇 번을 늘었다 줄었다 춤을 추었는데, 측정하는 사람의 기준에 따라 림프구 하나를 재기도 하고 두 개를 붙여 재기도 하고, 그리고 여포성 림프종에서는 잴 때마다 조금씩 크기 변화가 있는 것이 흔한 일이라고 한다 – 가 말이야 방구야 어떻게 15cm에서 6.8cm가 되냐고! 아무래도 종괴가 클 수록 치료가 힘들 것은 당연하기에 그 동안 크기 때문에 걱정한 것도 많았는데 살짝 힘이 빠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었다.
Tom은 진단과 동시에 바로 치료를 시작하는 공격성 림프종들과 달리 여포성 림프종의 치료 진행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인 GELF criteria 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7cm 이상의 종괴가 있거나, 3cm 이상의 림프절이 3개 이상 있을 경우, 야간 발한 및 체중 감소 등의 증상이 있는 경우, 종괴로 인해 장기가 눌려 통증이 있을 경우, 비장이 비대해지고 있거나 골수의 영향으로 빈혈이 있는 경우, 림프종 진행이 아주 빠른 경우, 그리고 림프종 때문에 흉수 또는 복수 등 물이 찬 경우 등이다. 이 중에 단 하나의 조건만 충족해도 치료를 바로 시작하는데, 나는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았다. 물론 7cm가 기준인데 6.8cm 니까 고지가 코앞이긴 하지만, 어쨌든 아직 기준에는 차지 않았다.
여포성 림프종은 매우 천천히 진행되고 증상 없이 수 년 동안 지내는 경우도 있으며, 치료를 한다고 해서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보다 오히려 치료로 인한 부작용만 있을 수 있으므로, 기준 중 하나라도 충족하는 시기가 와야 치료를 시작한다. 그 전까지는 경과 관찰 watch and wait 을 한다.
그렇게 걱정을 했는데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니. 정말 여러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들었지만 나는 일단 감사하기로 했다. 그래, 나 좀 많이 피곤한 거 빼고는 사실 아픈데 없으니까, 얼마나 좋아!
Tom은 나에게 조만간 PET-CT 를 찍어서 정확한 병변과 암세포의 활성도 등을 확인하고 다시 이야기 하자고 하며, 상기된 얼굴로 중요한 정보를 하나 덧붙였다. 만일 치료를 바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효과가 좋은 신약으로 임상실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우리 병원에서 1명 더 신청 가능한 상태인 것이 맞는지 간호사에게 재차 확인을 한 후 Tom은 진심 기뻐했다.
여포성 림프종은 앞서 설명한대로 재발이 잦고 완치가 어려우며 계속되는 치료에 불응성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병을 좀 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이를 위한 임상실험이 진행중인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 동안 미만성 거대 B세포 림프종 등에서 두 번 이상 전신 치료를 한 후 재발 또는 불응성이 된 사람들에게 쓰던 약(엡킨리)이 있는데, 이를 여포성 림프종 재발 환자에게 사용하는 임상을 진행했고, 재발이 아닌 신규 진단을 받은 환자에게도 바로 투약해보는 새로운 임상이 진행 중에 있는 것이다. 여포성 림프종 신규 진단? 나야 나! 이거 완전 럭키 비키잖아. 후에 받은 자료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동시 약 2000케이스 정도 진행중인 임상 실험이다.
나는 처음에 살짝 오해를 해서 내가 치료를 받으면 무조건 이 약을 쓰게 되는 것인 줄 알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임상실험에 참여하기로 결정을 하면 그 안에서 무작위 배정을 하여 이 약을 쓰게 될 수도, 못 쓰게 될 수도 있는 거였는데, 아니 내가 언제 임상실험에 참여를 해봤어야 알지!
GP 는 기본 상담 시간이 15분인데 비해 스페셜리스트는 30분이라고 들었지만, 정신 차려보니 한 시간 반이 지나고 있었고, 그 시간 동안 Tom은 인내심을 가지고 내 모든 질문에 정성 들여 대답해 주었다. 집에 가려고 드디어 일어날 때, 그는 따뜻하지만 굉장히 진지한 말투로 나에게 당부했다.
“어떤 약으로 어떻게 치료할지는 내가 다 고민할게. 그게 내 일이야. 넌 가서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재밌는 거 보고 논문 고만 찾아보고 푹 좀 쉬라구!”
나의 첫 혈액과 스페셜리스트 방문은 이렇게나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