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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초 Mar 18. 2021

나의 장례식, 그리고 그 후

죽고 사는 게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죽는 일'은 분명 갑작스럽고 황망하고 예기치 못한 것이기에 남겨진 자들에게는 혼이 빠지게 슬픈 일이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갑작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나는 죽고 없는데......

망자인 내가,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현생에서의 끈이 떨어져 나간 내 사랑하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베풀어주고 싶은 배려라고나 할까, 아니면 작은 바람 같은 것이 있다.

장례를 치르느라 맘과 몸이 분주하게 오가는 사이, 내 아들들의 가슴과 뒷덜미가 땀으로 흥건해지지 않을 만큼의 날씨가 계속되는 그런 날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장례를 마치고 나면, 한껏 농후해진 단풍으로 어디 산에라도 훌쩍 떠나고 싶은 맘이 내 남편에게 주저 없이 들 수 있는 그런 날들이 계속되는 가을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기운을 내는 일이 힘겹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운 계절이어서 마냥 귀찮고 힘겨운 일상으로 흐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뇌리에서 생각을 정리해 줄 구실로 이어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계란 프라이를 하거나 라면을 끓이는 것처럼 지극히 간단한 일에서조차도 궁색함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된장찌개를 끓일 때는 있는 것만 대충 넣어서 끓이는 일 없이, 쪽파도 송송 썰고 맛 좋은 손두부도 숭덩숭덩 썰어 넣어서 보글보글 끓여 먹을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으면 좋겠다.

설거지를 할 때, 밥풀 자국이 덜 닦인다거나 고춧물이 고스란히 남는 대신, 뽀득뽀득 헹궈져서 경쾌한 사기그릇 소리를 내며 차곡차곡 정리되는, 맞춘 듯한 흐름으로 저녁 시간이 지났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얼굴에서도 엄마의 부재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들끼리 킥킥대며 뭔가 군것질거리를 먹성 좋게 나눠 먹는 그런 끈끈한 분위기가 일상적으로 반복된다면, 면 티셔츠의 주름마저도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삶이 되겠지.

천륜의 기억이라는 것이 얼마간의 말미를 두고 끊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 평생을 거쳐 반추하게 되는 뼛속 깊은 추억이 되겠지만, 그래도 생을 살아가면서 가치 있는 일들을 해낼 때마다 용기와 응원의 에너지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남겨진 내 가족들이 남들로부터 받는 관심도, 그저 적당한 거리에서 믿고 바라봐주는 그런 편안한 정도의 시선이면 된다. 그런 여유와 자연스러움이면 나는 족하다.

그러니, 평소에 집안일을 혼자서만 다 해내는 슈퍼맘은 되지 말아야지. 갑작스러운 나의 부재 앞에서 뭣하나 손 쓸 수 없을 만큼 먹고사는 일이 고달프지 않도록, 나의 존재가 독보적으로 드러나게 하지는 말아야지.

쓸고 닦고 밥 짓고 빨래하는 기본적인 집안일이 귀찮게 취급되어 방치되는 일이 없도록, 누가 하더라도 서툴거나 어긋나지 않을 만큼의 분주함이면 좋겠다.

더 이상 내가 개입해서 뭔가를 해줄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적당히 바람 시원한 가을날, 황망한 장례식은 눈부시게 적당했으면 좋겠다.

그 적당한 장례식의 끝에서부터 매달려오는 그들의 삶들이, 보푸라기처럼 일어나 겉돌지 않고, 얼기설기 잘 짜인 옷감의 단정함처럼 군더더기 없이 맞춤하기를 바라본다. 그저 바라기만 할 뿐, 나에겐 더 이상의 시간이 없다. 죽음을 번복할 능력도 없다.

부디, 나는 없고 그들만이 남겨진 시간에는 눈부신 햇살 한 조각마저도 제각각의 자리에서 아련하게 빛나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없고 그들만이 남겨진' 그 시간이 부디 오래가지 않았으면 한다.

이렇게 바라지만, 뭐 이미 늦었다. 늦어버린 것이다. 내 삶은 그런대로 모든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니었다. 늦은 때만 고스란히 남아버렸다.


늦은 오후.

늘어진 햇살 아래에서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났더니, 방금 전 꿈속 생각이 옛날 일처럼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기분 탓이겠지.

초여름 한낮의 잠이 참 맥없이 허망하다.


죽고 사는 게 내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겠지만, '죽는 일'은 분명 갑작스럽고 황망하고 예기치 못한 것이기에 남겨진 자들에게는 혼이 빠지게 슬픈 일이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갑작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미 주어진 생을 착실히 살고 있는데......

살아있는 동안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밥 짓고 청소하며 그렇게 무던하게 살아가겠지......

얼른 밥 지으러 가야겠다. 청소기를 돌릴까? 아니지, 밥알이 다 불려졌을 테니 밀린 설거지부터 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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