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수업이었다. 분명 나도 배웠건만 생소하게만 들렸다. 원자가 분자가 되는 과정은 재밌고 놀라웠다. 그러나 원소의 기호를 외워야 하는 타이밍이 오자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다리도 점점 아팠다.
50분 내내 서서 듣는 건 괴로운 일이다. 알찬 수업을 준비한 과학 선생님도 50분 내내 괴롭지 않았을까.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라는 마음으로 엄마들이 쳐다보고 있으니, 그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 사뭇 짐작이 간다.
교실 맨 뒤에 서서 멀뚱멀뚱 서 있자니, 왠지 벌 받는 기분이었다. 학생들도 비슷한 감정이지 싶다. 학부형을 의식하며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평소와 다른 컨디션으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다.
사실 학부모 공개수업은 잘 가지 않게 된다. 안 와도 상관없다는 아이 말이 한 몫하지만, 그 보다 뻔한 내용과 보여주기 형식이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다. 고학년일수록 (아이가 점차 커갈수록) 공개수업에 참관하는 학부모 수가 줄어드는 걸 보면 딱히 '학부형 공개수업'의 메리트가 없는 듯하다.
이번 행사도 건너뛰려 했으나, 처음으로 아이가 와달라는 말에 참관하였다.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면 북적댈 교실이다. 그러나 이곳은 중학교 2학년 교실이다. 32명의 아이가 공부하는 교실에 7~8명의 학부형만이 참관했다.
교육부에 의하면, 초 중 고교의 수업 공개가 의무화이며 / 학부모 공개 수업은 학부모님들이 자녀의 학교 생활을 직접 관찰하고 이해하는 시간이라 한다.
정말로 그러했다. 수업 시간 아이가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그것들을 아이와 소통할 수 있었다. 수업 종이 울리면 교과서를 예쁘게 정리하고, 필요치 않는 물건은 책상에 두지 말라는 잔소리 소통과 짝꿍은 언제 바꾸는지, 어느 분단 자리에 앉는 게 좋은지 등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의 학교 생활을 1시간으로 확인하고 평가하기엔 부족하다. 나는 '평가'라는 단어보다 '내 아이 알기' 단어를 사용하겠다.
수업시간 엄마를 의식하는 내 아이의 모습에서 낯선 향기가 났다. 모르는 척 부끄러운듯한 태도에 섭섭했지만, 집에서 못 보던 모습이라 아이의 성장을 실감했다. 뿐만 아니라 부모의 통제가 없는 공간에서 책을 대하는 아이의 진짜 모습도 보았다. 그것만으로 아이의 관심사가 어딘지를 짐작하며, 어떻게 이 아이를 바른 방향으로 끌고 나갈 수 있을까 고민도 하게 되었다.
공개수업에 참관해서 좋은 점도 있는 반면, 아쉬운 점도 있었다. 솔직히 아주 많이 아쉬웠다. 교육청은 4차 산업 혁명 시대에 발맞춰, 창의성과 학생 중심성을 기본으로 미래 교육을 이끌어 갈거라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요즘 학교에는 교실마다 커다란 TV 가 있다. 모니터에서는 원자의 핵 그림과 설명이 보였고, 아이들은 칠판과 TV 모니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열심히 설명하시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열심히 들었다. 열심히 듣는 척하는 아이도 있을 거다.
교사 중심의 수업 방식은 교실에 TV가 없던 내 학창 시절과 똑같았다. 그저 생각 없이 받아들여야 하고, 암기해야만 한다. 사회에서 사용하지 않을 원소 기호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외워야 하는 현실, 부모가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는 수준의 수학 공식,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험을 대비하여 학원에 다녀야 하는 현실.
지금의 학생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치열해진 것만 같다. 이것이 내가 아이를 미국으로 보내려는 이유다. 물론 어느 나라든 공부는 어렵다. 다만 온 가족을 힘들게 만드는 지금의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 시스템이 우리 아이에게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다. 조금 덜 치열했던 시절에 공부했던 나 역시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걸 해외에서 배운 경험이 있다. 모든 사람이 같을 수야 없겠지만, 좀 더 넓은 세상에서 아이가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