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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자 Feb 22. 2022

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  나태주&유라 시화집

책이 있는 공간 220215



인생의 여행길에서 만난 노시인과 청년화가의 하모니




종일

 먹물 색이 온통 마음을 까맣게 칠한 날이었습니다. 추워진다더니 바람은 소리로 경고를 해댔습니다. 저녁 무렵의 바깥은 바람의 경고를 들어야 했다는 걸 깨닫게 했습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눈인사를 나누었던 아파트 근처에 살고 있는 길냥이들이 떠올랐습니다. 매서운 바람이 야속했습니다.


숨 쉴 때마다 콧등을 때리고 지나는,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바람의 심통에 마음만 조급해졌습니다. 조금만 덜 불기를 그래서 조금만 덜 춥기를 위태롭게 남아있는 빛에게 매달려보았습니다만, 잡히지 않는 빛은 모래처럼 부서지고 기어코 밤을 데려왔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다가 이내 멈춰버렸습니다. 아직은 섣부른 배부름 이었을까요. 쓰다만 글자들은 까만 커서가 저 홀로 깜박이며 시간을 먹습니다. 손가락은 어떤 활자 앞에서도 머뭇대기만 합니다.

결국 완성되지 못한 글들은 말 줄임표가 되어 점으로 똑똑똑 찍힌 채 검은 화면에 갇혔습니다.





 1 - 봄이 피고


그저 봄


만지지 마세요

바라보기만 하세요

그저 봄입니다.      



꽃밭에서


뽑으려 하니

모두가 잡초였지만


품으려 하니

모두가 꽃이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고 간다

누군지 모르고 만난다

무슨 일인지 모르고 한다

날마다 날마다

다시 날마다 열심히.   



휴머니즘


사람과 나무가 맞섰을 때

나는 나무 편


두 사람이 싸울 때

나는 지는 사람 편


두 마리의 짐승이 싸울 때도

나는 지는 짐승 편


너와 내가 맞섰을 때도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네 편.  


 




2 - 여름이 흐르고


멀리까지 보이는 날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 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 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 소리까지

끌려 들어온다


숨을 내어쉰다

뻐꾸기 울음소리

꾀꼬리 울음소리가

쓸려 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 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우뚝 다가와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 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 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3 - 가을이 익고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4 - 겨울이 내리다


모래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지 마라

본래가 먼지요 바람이었다

네가 그러했고 네가

심히 사랑했던 자가 그러했다


일으켜 세워보았자 인간의 집이고

다리이고 고작해야 돌탑

언젠가는 그것도 무너진다


무너져 먼지가 되고 바람이 되고

그래도 남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모래

너 자신이요

네가 사랑했던 자의 진신사리


통곡하지 마라 

통곡하지 말고 모래 한 줌

쥐어다가 가슴에 안아보라

철철철 넘치도록 안아보아라.    








'서로 다른 계절의 여행'은

'나태주' 시인과 그룹 '걸스데이'의 멤버 '유라'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와 유라의 유화가 함께 실려있습니다. 계절 이야기가 시와 그림에 담겼습니다.


유라가 그 유라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는 딱히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tv에서 본 기억만 있습니다. 걸스데이였다는 것도 이 시집을 읽으면서 알았습니다. 구닥다리가 되어선지 어느 순간부터 노래가 어렵게 느껴지기 시작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습니다.

그림은 잔잔하고 고독합니다. 외롭다는 말로는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바다도, 하늘도, 집도 나무도 마치 혼자만의 세상 같습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느낌입니다.


사계에 따른 시와 그림이 어울렁더울렁 각각의 맛을 냅니다.

갈까 말까 고뇌 중인 겨울과 분주히 달려오고 있지만 자꾸만 넘어지는 봄이 희망과 절망 속에 아우성대는 2월입니다.

2월 속에서도 이 시화집은 여름과 가을도 데려옵니다.

어째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계절인데도, 올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지금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아련함은 아득하게 젖어오고 기분은 말랑말랑해지는 걸까요.


시화집을 읽다가 돋아오는 사념들로 오늘을 도둑맞은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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