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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주껏빛나는 Apr 07. 2020

평행봉 그 끝엔

엄마 없이 엄마가 되는 나, 아내 없이 할아버지가 되는 아빠


밤 10시가 넘어 부산에 간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갑자기 저번 주에 살 거라던 겨울 외투는 샀냐며 얼마짜리를 샀냐 물어왔다. 아빠가 매번 딸에게 옷을 선물 받았었으니 이번엔 아빠가 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없으니 아빠가 대신 챙겨주겠다며. 아마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었던 아빠는 술을 마셨던 게 아닐까 싶다.

서른 살이 넘었는데 엄마 아빠가 사 주는 옷을 입는 사람이 어딨냐며 괜찮다 했지만 아빠는 결국 나에게 현금을 보내왔다. 옷 사 입은 데 보태 쓰고 나머지는 맛있는 것 사 먹으라는 메시지와 함께. 괄호 속에 들은 말은 아마도, 아기를 가져서 먹고 싶은 게 많을 텐데 챙겨줄 친정 엄마가 없고 아빠는 그 역할을 할 줄 몰라 이렇게나마 대신한다는 말이 있었지 않았을까. 그 생각을 하며 아무도 없는 불 꺼진 집에 홀로 들어가 핸드폰으로 계좌이체를 하는 아빠는 얼마나 애달팠을까.




그러고서는 생각이 많아진 채 잠이 들었는데, 엄마 기일에 집이 더러운 게 싫어 청소업체를 찾고 있었던 터라 그런지 비슷한 꿈을 꿨다.

우리가 미쳐 하지 못했던 일,
엄마의 죽음 전에 집을 정리하는 꿈을 꿨다.
신기하게도 우리 남편도 오빠도 아닌 회사 동료가 꿈에 함께 나왔다.

청소하는 사람을 불러 다 같이 집 정리를 했다. 필요 없는 가구들은 내어 놓고, 먼지를 쓸고 닦고.
그 와중에 나는 울음 섞인 표정으로 엄마에게 빈 편지지를 내밀었다. 우리에게 편지를 남겨주고 가라고. 그리고 회사 동료는, 사설업체가 있으니 해가 지날 때마다 아빠와 오빠와 나에게 매 해 생일선물로 엄마의 메시지를 담아 보낼 수 있게 해 주라는 제안을 했다. 본인의 지인이 받아봤는데, 돌아가신 엄마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는 자식들에게'라는 메시지와 함께 매 해 선물이 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슬픈 말이 어딨냐며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우리랑 멀어져 가고 있을까. 우리가 엄마랑 멀어져 가고 있을까. 일상을 되찾은 것이, 예전만큼 울지 않는 것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걸까. 왜 그런 문장이 꿈에서 우리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나왔을까. 아빠는 여전히 반쪽뿐인 부모가 된 것이 미안해 임신한 딸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데, 그 모습을 마주하고 나니 마음이 참 그랬나 보다. 이런 꿈을 꾼 걸 보면.




다른 사람들은 엄마가 해 주는데, 엄마가 없으니 아빠가 해줄게 라는 아빠의 웃음 섞인 말이 슬프다. 내가 엄마 없이 엄마가 되는 길을 가는 동안, 아빠 역시 아내 없이 할아버지가 되는 길을 걷는 중이었다. 내가 균형을 찾으려 애쓰는 동안 아빠 역시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건 마치 평행봉 위를 아빠와 내가 나란히 걷고 있는 기분이다. 한 쪽 평행봉엔 내가, 또 다른 한 쪽엔 아빠가. 그 사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엄마가 한 손으로 나를, 한 손으로는 아빠를 잡고 셋이 함께 걷는다면 참 안정적일텐데 중앙에 있어야 할 엄마가 없다. 그래서 나와 아빠는 균형을 잃고 위태 위태하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평행봉 위를 걷는 것 같은 이 길 마지막에는, 행복감만이 남아있을까 기대해보지만 잠깐을 스쳐 생각해도 행복하지만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한편에 엄마가 계속 남아있을 테니깐. 다만 조금의 슬픔이 섞인 행복이어도 엄마 이야기를 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멘털을 만들어보자는 어렴풋한 생각을 했다. 엄마라는 단어만 나와도 눈물 지을 내가 눈에 선해서 주변 사람 모두에게 엄마를 금기어처럼 만들지만은 말자는 다짐을 이 새벽에 해본다. 웃으면서 아가에게 외할머니가 있었다면 너를 참 좋아했을 거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뇌고 또 되뇌고 연습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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