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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May 10. 2020

나물 무침만 먹으면 죽을 수 있겠습니다

당신을 따라서


더는 버틸 수가 없어 이만 죽습니다
더는 삶에 미련이 없어 고이 죽습니다

이 토막 같은 말을 남기고 간 이를
나는 여태껏 활활 태우지 못했다

풀 죽은 슬픔이 습기를 머금었기에

도무지 쏟는 것들은 그칠 생각이 없어서
나는 무력하게 털썩 앉아 고요를 씹어대며
잠시나마 심심한 입을 어르고 달랜다

영혼의 생김새가 늘 궁금하다던
언젠가는 죽음으로써 그 형태를
하나도 빠짐없이 훑어보고야 말겠다던
당신과 함께 먹은 콩나물밥을 지어왔다

곁들일 짭조름하고 새콤한 장도 함께
군침 입가로 가파르게 흘려보내며
쓱쓱 비비다

죽으려면 곱게 죽을 것이지 그리 죽으면
나는 당신 삶에 한 톨 미련도 아니었던가
쌀알만도 못한 여생 밥 지어 먹고 살 수도 없겠네
하며 별안간 역정을 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려는 욕설을
이를 악물고 버티다 그만
이빨 두어 개가 밥상 위로 툭툭
떨어져 버렸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렇게 약할 리가 없는데

손끝부터 점점 옅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쥐고 있던 숟가락이 바닥으로 투신했다

내 영혼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하지만 이는 맺음새가 퍽 괜찮은 악몽의 농간

꽤 긴 잠을 헤매다 왔음에도
도무지 쏟는 것들은 그칠 생각이 없어서
나는 우산도 없이 당신 잠든 곳으로 간다

길섶에 제철 나물 무침처럼 맛 좋게
또 길차게 뻗어있는 들풀들 잔뜩 젖어있다
오늘 저녁에는 꼭 엇비슷한 것을 찬으로 내어야지
그리하여 도착한 당신 앞에 비스듬히 서서는

오늘 저녁 끼니만 든든히 챙겨 먹고
당신 따라 이만 죽겠습니다 했다

내게 남은 미련이라고는 단 하나
여기 오는 길에 본 들풀들 똑 닮은
나물 맛있게 무쳐서 밥 한 끼 먹는 것

그러니 오늘 저녁만 든든히 챙겨 먹고
삶에 미련 없이 고이 죽겠습니다 했다

_
<나물 무침만 먹으면 죽을 수 있겠습니다>, 하태완
2020. 5. 9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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