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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Oct 20. 2020

죽은 사랑의 기억

2020. 10. 9


  죽은 사랑의 기억은 언제나 때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하얗게 미화된다. 사랑에 죽었다는 표현을 쓰는 게 옳은 일인지 모르겠으나, 더는 펄떡거리며 박동하지 않는 사랑을 여전히 살아있다 말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지 않나. 나ᅳᆫ 아직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해 혼란을 안고 살아가는 날이 잦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연인과의 지난날들이, 왜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온통 애트한 일들로만 범벅 된 순간으로 단숨에 둔갑해버리고 마는 걸까.  수도 없이 다투고, 서로를 원망하고, 더 나아가 그 만남과 관계 자체를 의심했던 날들은 온데간데없고, 상대ᄇᆼ의 일그러진 표정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화창한 얼굴과 내 귓바퀴를 몇 번이나 맴돌다 끝끝내 귓속으로 파고들던 맑은 웃음소리, 그리고 나를 애틋하게 쳐다보던 그 소중한 눈빛만이 뇌리를 떠돌며 과거ᄅᆯ 회상하게끔 할 뿐이다.  간혹 흔한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다 영화처럼 그 사람과 마주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는 결코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표현이 아니다. 단지 그 사람이 지금도 여전히 잘살고 있는지, 예전과 같으 모습으로 이 험한 세상을 버텨내고 있는지, 내가 아직도 죽을 만큼 미운지, 우리의 마지막이 과연 어떤 모습이었던가 기억은 하고 있는지 다짜고짜 묻고 싶어서. 만약 그러한 순간에 기적처럼 닿게 된다고 해도, 그래서 하고 싶던 말들이 울음처럼 쏟아져 나오려 한다 해도, 안간힘을 다해 꾹 참아 내야만 한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순간의 벅찬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이성을 놓치게 된다면, 결국에는 어쩌면 우리 다시 안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어마어마한 망상에까지 닿고 말 테니까. 다시 사랑하자 말해볼까, 이전ᅪ 같은 실수 따위가 되풀이되는 일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찰나의 착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쩌면 내가 바로 어제 거닐었던 공원의 산책로를, 어제 저녁 식사를 했던 골목의 고깃집을, 창가 자리에 앉아 반나절 넘게 시간을 보냈던 가로수길의 카페를 당장에 오늘 그 사람이 당연하다는 듯 찾았을 수도 있다. 이렇듯 이별한 연인들의 활동 반경은 이상하리만큼 겹쳐지는 일이 잘 없다. 익살스러운 존재의 얄궂은 장난처럼, 단 한 번을 마주치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지나 보낼 수도 있다. 우리는 그 타이밍의 잔혹함에 늘 굴복할 수밖에 없는 거다.  한때는 그 사람이 자주 불행 앞에 놓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먼저 이 상처를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그 사람보다 행복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에는 사랑이며 그간의 정이며 하는 감정들을 따질 겨를조차 없었으니까. 그 사람을 향한 원망의 크기가 나보다도 커다란 모습으로 이 비좁은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비로소 그건 참 부끄럽고 부질없는 행동이었다는 것을 얕게나마 깨달았다.  물론 지금은 그 사람의 삶이 유달리 평화로웠으면, 하는 바람을 종종 품고는 한다. 지금 와서 어쩌려나 싶지만, 이 또한 지난 사랑이 원인 모를 작용으로 인해 깨끗하게 미화된 탓이리라.  아무쪼록 잘 지냈으면 좋겠다. 이게 아름답게 꾸며진 마음이건, 진심이 가득 담긴 마음이건, 사실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나. 혹여 살아가다 우연처럼 스치는 날이 오더라도, 멋쩍은 웃음 하나로 그간의 안부를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 저녁은 네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면 좋겠다고, 내일은 오늘보다 훨씬 행복해지라고, 우리 그래도 참 잘 해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순간 짧은 인사를 나누고서 각자 걷는 정반대의 여정은, 지난 이별의 순간에 서툴고 섣부르게 떠났던 정반대의 길과는 완전히 달라진 풍경이지 않을까. 우리는 분명히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는 따뜻한 색의 마음을 품은 채로, 계속해서 자신의 행복을 좇아 발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딜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보다도 멋진 작별을, 조금은 늦은 작별 인사를 차분히 나눌 수 있음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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