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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태완 Nov 03. 2020

사랑에 대하여

맑은 사랑을 채워 넣게 되기를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굳은 다짐도, 붉어진 눈으로 사랑을 경멸하는 파손된 마음도, 결국에는 또 다른 사랑 앞에 그 단단한 벽을 스스로 허물고야 마는 거다. 아무리 새로운 존재를 삶에 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한들, 그러한 상황을 고려할 겨를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사랑에 몽땅 흡수되어 버린다. 지난 사랑에서 맛본 실패의 파괴적인 충격은, 조작된 기억이나 어리석은 합리화 속에서 전부 소멸하고 만다. 이는 자신의 가슴께에 새겨진 깊은 흉터가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한 달여 만에 풍족한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짐승처럼 이성을 잃고서 상대에게 달려드는 모습일 게 분명하지 않나.
  이렇듯 급속도로 시작된 사랑의 초입은, 여느 연애가 다 그러한 것처럼 서로에 대한 불편하고 조심스러운 탐색으로 시작된다. 각자의 성향과 취미, 좋아하는 음악과 음식 같은 사소한 정보를 차례로 수집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듯 설렘 가득한 호기심이 지천에 묻어나는 과정에서는, 웬만해선 그 어떠한 다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흔히들 말하는 ‘콩깍지’가 여린 각막 위로 몹시 두껍게 씌어있는 탓에, 자신과 다르고 맞지 않는 상대방의 낯선 모습까지도 모두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마치 이는 앞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는 경솔한 표정까지 지어 보이면서 말이다.
  그렇게 연애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찰나의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면, 거짓말처럼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만 같은 다툼이 점차 잦아진다. 결국에는 앞서 말한 ‘나와 다른 점’이 그 다툼의 가장 큰 원흉이 되고 마는 거다. 한 번의 다툼이 있을 때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에서 오는 불안감을 완전히 이겨내지 못하고,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나 원망 같은 비루한 마음을 조금씩 키워가기 시작한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결별의 징조가 그때부터 고개를 슬쩍 내밀고서 호흡하는 것이다.

  어김없이 우리는 우리의 귀중한 사랑을 같은 형태로 반복해서 찍어내는 투박한 양산형 감정으로 전락시키는 일을 자처하고야 만다. 또다시 이제는 사랑 따위에 속지 않겠다는 형식적인 다짐을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를 강하게 배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이번이 처음이라는 듯이. 새로이 찾아오는 사랑에 흔한 눈길조차 주지 않을 수 있다는 음울하고 뻔뻔한 얼굴로.

  나는 사실 아직도 사랑의 참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너무도 많은 것을 가능케 하는 기적의 또 다른 형태일까, 아니라면 인간의 야들야들한 마음을 손쉽게 뚫고 들어가서 온 생애를 어지럽히는 혼란의 내핵일까. 그 진리가 어느 쪽이든, 나라는 사람은 정신 차릴 틈 없이 평생을 사랑에 휩쓸리며 살아갈 것을 알고 있다. 진작 끝나버린 사랑인들 쉽게 회피하지 않을 것이며, 새롭게 다가오는 사랑을 앞에 두고서는 기꺼이 활짝 열린 창문이 되어, 볕으로 오는 그 기적이며 혼란이며 하는 감정을 버선발로 반길 것이다.

  이 글에 내가 정말 담고 싶었던 말은, 사랑에 대한 깊은 생채기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랑을 꿈꾸지도 말라는 말이 아니다. 충분한 회복과 공백을 경험하고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 사람이라면 내 흉진 삶을 불쑥 안겨 주어도 괜찮겠다 싶을 때, 그때 공허로 가득 찬 심장을 새로운 사랑으로 가득 채웠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내가 지금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서 행복에 겨워 수시로 맑은 울음을 터트리는 것처럼, 하루빨리 당신도 그 깊숙한 속에 담긴 검은 울음을 모두 게워내고,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맑은 사랑을 채워 넣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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