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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희 Aug 23. 2020

나는 그런 사람이었더라

과거 분석 (3)

적극적으로 즐긴 혼자만의 시간은 그 시간을 쓰는 방법만을 알려준 것이 아니다. 그 시간을 쓰기 위해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야 했다.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과연 내가 해오던 것들이 다 내가 원해서 해오던 것들인가, 나는 정말 힘든 적이 없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했다.


온전한 내가 아닌 이미지에 갇혀있더라


나는 가족들이나 친구들한테 힘들다는 말을 잘 안 한다. '힘들어도 견뎌야 하는 거야', '이 고비만 넘기면 다 괜찮아지게 되어있어', '하기 싫어도 해야지' 등의 말들을 들으며 자라왔다. 자연스럽게 나는 하기 싫어서 몸에 소름이 돋는 순간에도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앞에 놓인 일들을 해왔다. 하기 싫은 마음 때문에 칭얼거림과 짜증은 냈어도 나도 알았거든.. 이게 고비이고 이것만 넘기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다 해결되어있는 거. 그렇게 어린 시절의 나는 '독한 애'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악바리 같이 내 앞에 놓여있는 것들을 했다. 그렇게 살아야 잘 사는 거라고 가이드를 받았으니까.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는 이미지는 '뭐든 잘 해낼 것 같은 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잘할 것 같은 애'로 굳어졌다. 나 스스로도 그런 내 이미지에 대한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뭐든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 잡은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했고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SKY 대학은 따 놓은 당상인 줄 알았다.


현실은 혹독했다. 나보다 잘나고 머리도 좋은 친구들이 많았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까지 포기하면서까지 공부를 했지만 늘 한계에 부딪혔다. 좋아하는 것이라면 '합창'이다. 난 초등학교 때부터 합창을 즐겨했다. 고등학교에도 합창 동아리가 있어서 꼭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연습 때문에 공부시간 뺏긴다는 이유로 가입 지원서 제출 조차 만류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남과 비교를 하면서 나는 내가 내 이미지에 닿지 못하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에 부모님이 실망하는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재수를 해서 SKY 대학은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과로 들어가 파릇파릇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인생 친구들을 사귀었고, 원해서 열심히 공부했고, 해외도 나가서 세상을 경험하면서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한편이 추억으로 저릿저릿한 4년이었다. 삐걱댔던 순간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학에서의 자유를 맛본 나는 친구들과 밤늦게 놀고 싶은 날도 있었고 가끔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싶은 날들이 있었다. 집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타협을 해야 했고 대학 시절에도 내 이미지는 '바른생활하는 애'였다. 하지만 친구들은 안다. 내가 얼마나 자유롭고 싶어 했는지. 얼마나 그 이미지를 깨고 Work Hard, Play Hard 하고 싶어 했는지. 친구들하고 있을 때 알람처럼 울려대는 전화가 정말 싫었으니까.


대학 졸업 후 앞날은 순탄할 줄 알았다. 서울의 4년제 대학을 나왔고, 외국어를 구사하고, 대외활동도 이 정도 했으니 대기업을 가겠지?라는 근거 없는 상상의 나래는 왜 펼쳤던 건지. 나는 대학을 졸업할 때에도 내게 맞는 길 보다 남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길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던 것 같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20대 중반에 맞이한 사춘기


내가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 벽에 부딪히고, 내가 좋아하는 내 모습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나를 가둬 놓은 이미지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을 깨고 진짜 자아가 튀어나오기 시작하면서 나는 조금씩 달라졌다. 주변의 기대에 날 맞추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만들어진 내 이미지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 자아가 제대로 반항하기 시작한 것은 첫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와서 암흑기를 맛보고 있던 시절 부모님이 원치 않던 사람과의 교제다. 욕쟁이 사장이 있던 첫 회사에서의 좌절을 맛보고, 두 번째 앉은 사무실에선 월급을 못줬다. 하고 싶은 일로 가득하던 대학 졸업생이 활기를 완전히 잃으면서 만난 한줄기 빛 같던 사람은 내가 내 행복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위험한 관계임을 감지하신 부모님은 뜯어말리고 싶으셨을 거다.


하지만 내가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 때문에 집에서 죄인 취급을 받는 순간, 나는 돌아섰다. 내 유일한 행복을 불행이라 말하고 계셨으니까. 잘한 짓은 절대 아니지만 그때 나는 부모님께 선을 그었다. 그리고 그때 분명히 알게 된 하나. 난 내 인생에서 크게 3가지 '진로/학업, 친구, 그리고 사랑'은 내가 결정해야 행복하다는 것. 이 부분은 내가 가혹하게 선을 그어서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조종을 하려는 느낌을 받는 것이 더 이상은 용납이 안되었던 것 같다. 내가 당신들도 마음에 드는 집안의 자식과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그 이미지를 난 그때 아주... 박살을 냈으니까.


반항은 1년 정도 이어졌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친구들하고 나가 노는 것도 해보고, 밤에 늦게 들어오는 것도 해보고, 집에 들어와서 새벽 3시에 고래고래 부모님과 싸우기도 해 봤다. 나는 나 좀 믿고 놔달라고, 부모님은 절대 안 된다고. 그 폭풍도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가족 간의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 않던가. 부모님도 점차 받아들이셨다. 이 지지배를 이제는 좀 놔줘도 책임을 지고 알아서 행동한다는 것. 슬슬 독립된 개체가 되어 간다는 것. 26년이 지난 후에야 그렇게 부모님은 내가 본인들과 다른 존재라는 것을 조금씩 인정해주셨다. 나도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잘할 수 있는 일에 더욱 집중했고, 그걸로 주변의 인정을 받았다. 즐기기도 열심히 즐겼다. 문화생활도 열심히 했고, 먹고 마시는 즐거움, 가끔 나를 내려놓고 주변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즐기는 즐거움도 만끽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게 좋았으니까.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을 찾을 수록 자연스럽게 훨씬 여유로워졌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20대 후반, 부모님이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방문하셨을 때 비로소 털어놓은 것 같다.

'나는 사실 엄마 아빠가 생각하는 나대로 사는 게 너무 힘들었던 거 같아.'

'엄마, 나는 사실 고등학교 때 합창이 정말 정말 하고 싶었어. 합창 못하게 한건 아직도 좀 원망해.'

'나는 그때로 돌아가도 아마 똑같이 선 그었을 거야.'


힘들었던 부분, 나에게는 상처였던 부분들을 꺼내어 보여드림으로써 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삶도 잘 가꾸고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나 하나만 잘 키우는 것에 최선을 다하셨고 그 덕에 나도 잘 자랐지만 이제는 엄마 아빠가 잡아준 이미지가 아니라 내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가며 잘 살고 있다고. 해외에 나와서 혼자 살아갈 정도로 많이 우뚝 서고 있다고. 내가 나를 믿지만 부모님도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오히려 지금 훨씬 나는 자유롭게 나답게 잘살고 있다. 주변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 성과에 집중하면서 살아간다. 그 와중에도 한국으로의 귀국을 고민하게 된 건, 이 곳에서 평생 살 것은 아닌 것 같아서다. 내가 만들어가는 나만의 이미지는 익숙한 환경에서 완벽히 떠나오면서 또 한번 확립이 되었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도 충분히 판단하며 살아가고 있다. 다만, 외국인으로 살다 보면 내가 이 세계의 문화에 맞춰서 나를 끼워 맞춰야 하는 이미지들이 또 있다. 그 이미지를 또 개척해 나가기 위해 에너지를 쏟기보다 한국에서 흔들리지 않는 나다운 모습으로 살아가는데 힘을 쏟고 싶어 졌다. 가족들 옆에서, 친구들 옆에서 서로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같이 잘 크고 있다고 재잘재잘 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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