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줏대를 유지하는 건 어렵단 말이죠
한 달 전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했다.
회사 조퇴까지하고 진료를 받으러 갔었는데 예약날짜가 아니었던 것이다..
허탕을 치고 돌아 나오는데 내 눈 앞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이라는 표지가 보였다.
나는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는 생각을 예전부터 많이 했었기 때문에 그거라도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간단한 설명을 듣고 시원하게 연명의료를 거부한다는 서류를 작성해 제출했다.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약으로 사람을 살려두는데 아무런 의식도 없는.
웰다잉(Well dying)이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것을 존엄성, 가치, 품위를 지키며 죽는 것이다.
안락사에 대해서도 크게 거부감은 없다.
그런데 오늘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보고 약간 내가 갖고 있던 웰다잉, 잘 죽음(?)에 대한 신념이 흔들렸다.
할머니께서는 식사가 어려우셔서 콧줄로 식사를 하시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아빠에게 의사를 물어본 것이다.
할머니의 의사는 우리는 알 수 없이 오직 가족들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는 할머니를 끝까지 괴롭힐 뿐인 무의미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는 아빠를 보니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남을 가족을 위한 죽기 전 마지막 배려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서 보듯 우리 집은 재산으로 싸울 일이 없다. 재산이 없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사랑, 슬픔과 같은 원초적인 감정만 있는듯하다.)
나 역시 자연사 이전에 병이나 어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연명의료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를 위한 건 당연히 처음 내 마음과 같이 연명의료를 하지 않는 것인데 슬퍼할 가족들을 생각하면 며칠이라도 내 존재를 물리적으로 느끼게 해 주는 게 배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고통스러워도 어차피 죽기 전 마지막 인내, 배려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은 연명의료의향서 제출한 것을 당장 취소하라고 했다.
정말 당연하고 공평한 죽음 앞에서도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것들이 많다는 게 아쉽다.
모두가 그냥 자연스럽게 왔다 갈 수 있으면, 맞이하고 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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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절주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