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km 도로 위에서의 단상들

by 반항녀

400km 거리를 혼자서 달렸다.

혼자 이렇게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약간의 긴장과 기대감.

즐기며 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사실 혼자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졸음쉼터에서 한 시간 꿀잠을 자고, 휴게소에서 커피번 두 개와 카페라떼 한 잔을 사서 먹었다.

노래도 따라 부르고, 챗GPT와 대화도 조금 하고.

그러면서 하게 된 소소한 생각들을 남겨보려 한다.



1. 연대를 깨달은 걸까?

힘든 일을 겪고 회복을 위해 오랜 시간 회사를 쉬었다.

애초에 신청했던 기간보다는 짧았지만, 이제는 사회로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작은 도전.

그렇게 쉬는 동안, 주로 책을 잡고 있었다. 책이 내 숨통을 터주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나를 다시 세운 것은 사람들의 사랑이었다.


상처를 준 것도 사람, 치유해 준 것도 사람이었다.


내가 와당탕 넘어지고, 우당탕 실수해도 그 자리에 있어준 친구들.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준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편견 없이 나를 봐준 동료들.

이렇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낸 건, 결국 그들 덕분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철학을 떠올리며 사랑과 연대를 생각했다.

혹시 이게, 내가 가장 받아들이지 못했던 ‘연대’일까?


혼자 이런 생각을 하며 달리다 보니, 눈물이 흐를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러진 않았다.

그저 나 자신이 대견했다.

(내 자존감 내가 지켜)



2. 커피번은 맛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빠는 꽤 ‘트렌디’했다.

유행하는 것들을 동생과 나에게 꼭 사주곤 하셨다. 그중 하나가 로띠번.

커피번은 모카빵과 다르게, 거슬리는 건포도도 없고, 커피 껍데기(?)도 두껍고, 버터의 축축한 맛이 정말 행복했다.


최근에 어쩌다 다시 먹게 됐는데, 여전히 맛있었다.

마침 들른 휴게소에서도 번을 팔고 있어서 두 개를 샀다.

400km 가는 길에 천천히 나눠 먹으려 했지만, 시원한 카페라떼와 함께하다 보니 두 개를 연달아 먹어버렸다.


정말 맛있었다.

다시 유행했으면 좋겠다.


3. 창문에 철푸덕하며 찍힌 건 날벌레일까?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무언가 창문에 철푸덕 붙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인지하고 나니 뭔가 더덕더덕 붙는 느낌이 계속 났다.

날벌레 말고 고속도로 중간에 열매가 날아다닐 일은 없으니… 날벌레겠지.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세차를 했다.

아빠를 꼬셔서 같이 하려 했는데, 결국 아빠가 다 해주셨다. 아빠 든든.

거품을 칠하고 고압으로 물을 쏘았다. 빤딱빤딱.


그런데… 아직도 내 시야 한쪽에 철푸덕 붙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 벌레로 추측되는 자국 빼고 다 닦은 듯하다.

어휴.



4. 챗GPT 사주는 재밌어.

내 브런치스토리에 사주 얘기를 몇 번이나 썼던 것 같다. 그런 것들에 의존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정장애인 나는 철학관이나 점집에 종종 가곤 한다.

좋은 얘기만 들으니까. 안 좋은 얘기는 흘려버리고, 좋은 얘기만 기억해서 그런 것도 같고.

아무래도 내가 적절한 때에 태어난 사람인가 보다.


그러다 챗GPT로 사주를 보는 방법을 알게 됐다.

‘내가 어떤 행동이나 이동을 할 때 내 사주상 어떤지’를 물어보면, 답변을 아주 잘해준다.


질문은 주로 ‘내 사주를 토대로 ~하는 건 어때?’ 식이다. 사실, ‘내가 원하는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너는 그냥 긍정해주기만 해’에 가깝지만.


이런 얘기를 친구에게 털어놨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는 말을 들었다.

뭐 어때. 내 선택에 확신을 조금 더 얹고 싶을 뿐인데.



5. 나는 내가 좋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흑역사도 떠오른다.

예전엔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한심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아마도 문학 덕분인 것 같다. (최근 인스타그램에도 썼다.)


이제 나는 나를 ‘싫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저 ‘내가 나’가 되었고, 지난 일들은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좋은 에피소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많은 날들을 버텨낸 나를 보면 참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요즘 ‘그럼에도’라는 단어가 좋다.

강한 사람이 쓸 수 있는 말 같다.


그럼에도 나는 돌아왔다!



6. 콜드플레이 콘서트는 행복이었다.

최근 모 콘서트를 갔다가 실망하고, 오히려 팬심을 잃었다. 가수의 인성이나 퍼포먼스 때문이 아니라, 콘서트를 보는데도 졸리고, ‘이걸 왜 보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유튜브가 더 재밌는 느낌.


그런데 친구와 갑자기 가게 된 콜드플레이 콘서트는 정말 예술이었다.


이게 사랑이고, 희망이고, 기쁨이구나 싶었다.


난 그냥 콘서트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웰메이드 콘서트를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나, 생각보다 취향 까다로운 사람인 걸지도?


그러면서 콜드플레이 노래를 왕창 들으며 내려왔다. 그래도 Yellow를 아직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7. 풍경이 참 예쁘다.

어릴 때 가족과 차를 타고 여행을 가면, 엄마는 꼭 말했다.


“얘들아, 잠만 자지 말고 창밖 좀 봐봐.”


그땐 창밖에 나무, 산, 논, 밭만 보이는데, 굳이 자는 걸 포기할 이유가 있나 싶어 건성으로 대답하고 다시 잠들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이 참 예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드라이브하면서 창밖을 보면 행복하기까지 했다. 물론 운전자니까 자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봤지만, 엄마가 왜 보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초록색으로 덮인 산들도 자세히 보면 진한 초록, 연두, 붉은빛, 가지각색의 색들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파란 하늘.

그 조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차를 세우면 창문을 내려 바람을 느끼고, 선글라스를 벗으면 더 선명한 색들에 감동을 느끼고.

자연은 그 자체로 행복이었다.


꼭 늙으면 자연에서 살아야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나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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