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요즘 인기 있다는 한 걸그룹의 영상을 보았습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화면을 좇던 중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는데요.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춤을 추는 멤버들이 모두 똑같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똑같이 예뻐서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가 없더라구요.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한 듯 당혹스러웠습니다. 분명 매혹적인 외모였지만 왠지 소름이 돋았습니다.
생의 대부분을 세상이 정해놓은 미의 기준 바깥에서 살아왔습니다. 개인의 특성이 사라지고 정형화되어가는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민낯이 진실이라는 강박 비슷한 것도 있었고 꾸미는데 재주도 별로 없었고요. 무엇보다 그럭저럭 큰 불편 없이 지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미묘한 마음의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하네요. 걸그룹 영상을 보며 섬뜩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그 예쁨이 궁금해지면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루빈스타인은 참 예쁩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보석 같은 눈이나 조각처럼 오뚝한 코 그리고 우아하고 섬세한 손이나 춤추는 듯한 발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그녀의 덥수룩한 수염만 쳐다봅니다. 그녀는 발리우드 서커스에서 가장 유명한 출연자입니다.
어는 날 벤치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옵니다. 그의 이름은 파블로프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이 마음에 듭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마주 보며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녀는 참 예쁘고 그는 참 멋집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두 사람 얼굴에 가득 핀 웃음꽃을 보지 못하고 두 사람 사이에 싹튼 사랑을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녀의 덥수룩한 수염만 보고 그의 유별나게 긴 코만 봅니다. 그는 거스톤 서커스에서 아주 유명한 코끼리 남자입니다.
예쁜 얼굴이 참 흔해졌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예쁨에는 타고난 것도 있지만 후천적 노력도 꽤 크다는 걸 알고 나면 여름 장마처럼 눅눅하고 찝찝한 기분에 젖기도 합니다. 거울 앞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나의 무지함과 게으름의 흔적에 괜히 울적하고 의기소침해지죠.
보이는 것이 중요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잘 포장하는 것이 뛰어난 능력으로 여겨지기도 하죠. 남들로부터 인정과 찬사를 받고 싶은 욕망은 정당한 것이기에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그만큼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림책 '루빈스타인은 참 예뻐요'가 건네는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루빈스타인과 파블로프의 외모 중 특이한 부분만을 보았기에 이들이 얼마나 예쁘고 멋진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아름다움을 알아본 두 사람은 남들의 시선이 아닌 자신들의 사랑에 집중합니다. 그 모습이 너무 세련되고 낭만적이어서 부럽고 질투가 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을 보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욕망에 흔들리는 요즘의 나 자신을 타이릅니다. 모두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다고, 나만의 특별한 매력을 감추지 말라고, 나를 예쁘고 멋지게 봐주고 사랑해주는 사람 한 명이면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