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설거지만 하면 되려나..' 시계를 보니 새벽 12시가 다 되었다. 부산에서 올라오고 있는 시부모님과 시동생 가족들의 예상 도착시간은 새벽 1시 30분이니 남은 그릇만 간단히 정리하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오랜만에 시댁 식구들이 다 같이 모이는 의미도 있었지만, 여름옷 정리를 핑계 삼아 그동안 쌓아두었던 먼지들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에 한 달 동안 대청소를 했다.
베란다와 욕실을 점령하던 매트를 버리고 바닥에 쌓인 먼지와 곰팡이를 제거했다. 바닥을 깨끗이 하고 짐을 정렬하는 것만으로 신혼 때 느꼈던 청결함을 다시 한번 마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생선포처럼 말라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5년 된 고등어와 케케묵은 음식 덩어리들까지 정리했더니 냉동고 안쪽에서 빛나는 밝은 조명이 눈에 들어왔다. 손님이 온다는 좋은 핑계로 누군가 볼 일없는 냉장고까지 정리한 것이다.
새벽 늦게 도착한 시아버지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부산에서 인천까지 오는 장거리였고 휴게소에서 뭐 하나 드시지 못하고 오셨던 터라 많이 시장하신 것 같았다.
이사라도 온 것처럼 수북이 쌓여있는 짐들을 정리한 뒤 빠르게 라면을 끓였다. 어머니가 해오신 갓 익은 알타리와 라면의 궁합은 환상적이어서 라면을 더찾게 됐다.MT때처럼 식은 국물에 면을 추가로 넣어 끓여 먹었더니 아버지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게 느껴졌다.
식구들의 배를 채우니 여유가 생겼다. 아들집에 오시면 청소하느라 바쁘시던 시어머니에게 모델 하우스인 것처럼 안내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여기 화장실 매트 치웠어요"
"어머니, 베란다 정리한 거 보세요"
"어머니, 냉동고 깨끗해졌죠?"
이번에는 오셔서 편히 계시라며 대청소한 것을 자랑했다.
"애들 등하원 시키기도 바쁜데 언제 이렇게 청소를 했어"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우시며 어머니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새벽 3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늦은 밤에 잤지만 15명이 먹어야 하는 아침 식사를 생각하니 눈이 번쩍 떠졌다. 다 같이 도와준 덕분에 대식구의 아침식사는 무리 없이 끝마쳐졌지만날씨 때문에 삼시 세 끼를 돌아야 한다니...
하필 어린이날 비가 올 것은 무엇이랴.
야외활동을 준비했지만 문턱을 넘기 힘든 날씨였다. 비바람이 세차게 불던 어린이날, 크지 않은 평수에 15명이 쾌적하게 지내기 위해 에어컨을 가동했다. 제습모드로 맞춰진 덕분에 거실에서 온 가족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요새는 시댁 식구와 모이면 고스톱을 치는 게 당연한 흐름이 되었다.
"돈 가꼬 온나"
신호탄처럼 울려 퍼지는 소리에 맞춰 각 집의 선수들이 입장한다. 져야만 즐거운 고스톱이 시작된 것이다. 어머니의 수중에 쌓여가는 지폐와 동전들이 많아져야 분위기는 고조된다. 야식을 시키지 않았다면 새벽 2시까지 갔을 판이었지만 야들야들하고 촉촉한 족발이 왔으니 이제는 먹어야 하는 시간이다.
족발과 수다라는 안주는 씹어도 씹어도 맛있어서 또 새벽 3시가 넘어 잠이 들었다. 이쯤 되니 나의 체력에는 한계가 왔다. 대청소와 늦은 시간까지 놀면서 채워지지 못한 수면 부족이 왼쪽 눈썹 위 떨림으로 표출된 것이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어버이날을 미리 축하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 있는 반찬 없는 반찬 모두 올려 많은 것을 준비한 듯 상을 차렸다. 그리고 어버이날을 기념하기 위한 카네이션 생화를 대신 수박에 꽃을 파서 올렸다.
하루 전 날 시누는 조카에게 미션을 주었다.
'수박에 카네이션 새기기'
미션을 받아 든 16살 조카는 솜씨 좋게 커터칼을 이용해서 I love you와 카네이션 모양을 수박에 새겨 넣었다. 실용적인 것을 선호하는 시댁의 성향에 딱 맞는 카네이션이었다.
시부모님 또한 큰 손녀가 멋지게 새겨 넣은 카네이션 꽃을 좋아하셨다.작은 선물밖에 드리지 못했지만 온 가족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수박에 새긴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카네이션까지 드렸더니 큰 효도를 한 느낌이었다.
동서식구가 부산에 가고 난 뒤 집을 정리하고 이천에 있는 친정에 내려갔다. 시누가 챙겨준 청포도와 수박을 실고 가면서 슈퍼에 들러 따로 살 것이 없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고속도로를 탄 순간 어버이날 선물을 놓고 온 게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것은 나에게 굉장히 힘든 일이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지, 혹시 이미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하는 것이 어렵다. 시댁은 형제가 있으니 의견을 물어보고 구매하면 되지만 외동딸인 나는 물어볼 곳이 없다.
그나마 부모님이 드시는 건강보조식품이 있어서 시부모님 것을 살 때 하루 만에 배송되는 제품으로 미리 준비했다고 좋아했는데 빈 손으로 들어가야만 했다.돈만 드리면 성의가 없을까? 다음에 사놓은 선물을 드릴까? 고민만 하던 찰나였다.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베란다에서 카네이션 바구니를 들고 나오셨다.
시댁과 달리 친정은 상징적인 것을 좋아한다.
기념일을 꼭 챙기기에 결혼기념일에도 장인 장모가 축하한다고 인사해 주는 집이다. 꽃이 쓸 곳이 없어도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는 가정이다.
엄마는 90이 넘은 외할머니에게 딸로서 할 수 있는 감사의 마음을 꽃 바구니에 넣어 표현한 것이다.
만나는 것 만으로 의미 있다며 포장했지만 내용물 없는 박스를 건넸다. 얼굴이라도 봤으니 다행이지 않았냐는 마음을 접고 급한 대로 봉투에 돈을 넣었다.가져오지 못한 선물은 다음에 드린다 치부하더라도 빈손으로 왔다가 갈 수는 없었다. 이마저도 미리 준비하지 못한 게 죄송스러워 이불 안에 숨겨두고 나왔다.
"어버이날 감사드려요, 선물은 이불속에 숨겨두었으니 찾아서 필요한 곳에 쓰세요"
보물 찾기를 하듯 들뜬 부모님의 목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다.
시댁보다 친정에 드린 액수가 컸음에도 불편한 마음이 생긴 건 '카네이션' 때문이다. 지금은 먼지가 쌓여 가려진 향초 카네이션이나 비누꽃으로 만든 카네이션 등을 드릴 때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아이들 케어와 청소 때문에 바쁘다는 이유로 많은 것이 소홀했다. 단순히 카네이션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소 안부전화마저 부쩍 적어진 것을 돌이켜 본다. '몰빵 효도 말고 데일리 효도하자' 다짐했다.
어버이날이 되었다. 전화로 감사의 말을 전해야지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먼저 인사를 시켰다. 그런데 인사를 받은 엄마가 아이들에게 물어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