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모니터
초등학생 육아일기 (9) #풍족한 사회 #기다림의 미학
우리 집 1,2호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통영이다.
누군가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탁 트인 경치를 보러 가겠지만, 아이들은 형들을 만나러 간다.
큰 아이 기준으로 1살, 2살, 4살 많은 형들은 큰 아이가 5살 무렵부터 만났으니 제법 오래 만난 사이다.
아이들 아빠의 사촌 누나의 자식들이니 촌수로도 제법 멀고, 누군가에게는 살면서 몇 번 만나기 힘든 먼 친척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들 아빠와 누나가 워낙 가까운 사이고, 장거리 여행과 바다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더없이 좋은 여행지인 관계로 우린 일 년에 3-4번씩 통영을 찾곤 한다.
번거롭고 귀찮을 만도 한데 형들은 늘 아이들을 반기고 잘 놀아주었다. 우리 아이들 수준에 맞춰 놀러 갈 곳을 정해도 한 번도 투덜거리는 법이 없었다. 축구나 농구를 할 때면 늘 동생들이 공을 한 번이라도 더 잡고 골을 넣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이런 형들이 있다 보니 아이들은 언제라도 통영 여행은 대환영!
몸으로 놀던 유아기를 지나 초등학생이 되면서 형들이랑 게임도 한두 번씩 하곤 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거실에 있던 컴퓨터 모니터가 고장 나 있었다. 삼 형제 중 하나가 가방으로 툭치고 지나갔는데 모니터가 앞으로 넘어지면서 화면이 박살난 모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리 집에 쓰지 않는 모니터가 하나 있던 것이 생각나 집에 가서 보고 상태가 괜찮으면 통영으로 보내드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 와 살펴보니, 내가 가진 모니터 상태도 썩 좋지 않았다.
"고모, 모니터 상태가 별로라서 드리기가 좀 그렇네요. 어쩌죠?"
"괜찮아요. 하나 사 줄 생각인데, 때를 보고 있어요."
"때요?"
"네, 뭐든 부서지고 망가졌다고 바로 사줄 수는 없어서요. 아이들이 망가뜨린 거니까 좀 기다려야죠."
바로 그거였다. 제 물건을 제자리에 잘 정리하고, 뭐든 더 사달라 조르는 법이 없었던 삼 형제는 이렇게 길러진 것이었다. 실수로 모니터를 망가뜨렸다는 이유로 혼이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바로 사주지도 않는 것. 아이들이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지고 적당한 처분을 기다릴 줄 아는 것. 그게 바로 양보하고 기다릴 줄 아는 멋진 형들을 길러낸 고모의 노하우였다.
하나뿐인 귀한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경험을 나는 아이들에게 주고 있는 걸까?
그동안 내가 무엇이든 망가지면 서둘러 고쳐주지 않았었는지, 필요하다고 하기 전에 사주고는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타박하지 않았는지, 물건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껴 사용할 기회를 빼앗아 왔던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쩜 아이들뿐만 아니라 나도 그것을 충분히 경험하지 않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버튼만 하나 누르면 순식간에 문 앞에 물건이 배달되는 세상에서 우린 무엇이든 새로 사고 대체하는 것에 중독되어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