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희수 Dec 02. 2021

서른 살, 일단 틀리고 시작하기로 했다 - 김은애

Born in 1993.02.13

 

 지오디에게 ‘어머님께’가 있다면 나에게는 ‘교수님께’가 있었다. 교수님께 권법에는 나름의 룰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인스타그램의 무분별한 해시태그와 비슷했다. 우선 책 표지만 봤다 하면 누구나 알법한 단어를 쭉 나열한다. #소비자심리 #매슬로우의욕구단계설 #전략경영 처럼 말이다. 이때의 포인트는 뻔뻔함이다. 이 중에 교수님이 원하는 답 하나는 있겠죠? 싶은 느낌. 해시태그를 완료했다면 다음은 구구절절한 편지다.  나에게는 정말 어쩌지 못할 사정이 있었고, 교수님이 관용을 베풀지 않으면 내 인생은 박살이 날 것 같으며, 나는 평소에 교수님을 얼마나 존경해 왔는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써내려가야 한다. 동시에 심금을 울리는 필력을 발휘해야 했는데, 한시간 내에 이를 완수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수 년간 이 스킬을 연마한 끝에 나는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4년제 경영대학을 6년제 의과대학 친구와 함께 졸업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 때 내 나이 스물 다섯이었다.


 졸업 후에도 ‘교수님께’는 그 형태와 내용을 달리한 채로 계속되었다. 때로는 자소서가 되었고 때로는 면접답안이 되었으며 때로는 부모님 전상서가 되기도 했다. 사실 그때의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내가 인플루언서가 아닌 이상 나의 해시태그를 읽어줄 이는 없고,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먹히질 않는다는 걸 느껴버렸기 때문이다. 느리더라도 차근차근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 스토리는 세상 가장 부질없는 것이었다. 변명이 늘어갔다. 세상은 마치 내가 떳떳하지 않길 바라는 것 같았다. 뒤쳐지는 느낌이 드는 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아무것도 이룬 것은 없는데 나는 착실히 나이만 먹어가고 있었다. 두려웠다. 그래서 백기를 들고 세상과 타협했다. 그 때 내 나이 고작 스물 일곱이었다.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돌아가자 오지랖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모두가 그게 정답이라고 하니 나도 그러려니 생각했다. 이러쿵 저러쿵 나와 나의 생각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 한편으로는 편안했다. 아니, 나는 그런 삶이 편하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너는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해’. 전 같으면 게거품을 물고 들이 받았을 말을 듣고도 ‘아 넵’ 하고 마는 그저그런 사회인 1로 무사히 성장했을 때 내 나이 스물 여덟이었다.


  하지만 구구절절 DNA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수많은 선택지 중 나름의 의미를 찾아 고른 일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어느 순간 내 안의 의미부여맨이 불평불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회인은 다 그래, 어른은 다 그래 하며 그 불평불만을 억누르다 병이 났다. 한 번 터진 마음은 스스로 아물 줄을 몰랐고, 결국 몇 년을 참아온 설움도 함께 터졌다. ‘내 인생이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미치겠어’ 다시 생각해도 구린 멘트를 내뱉으며 눈물을 쏟던 날, 나는 사직서를 마음에 품었다. 그 때 내 나이 스물 아홉이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와 다를바 없는 사회인 1인 교수님께서 어떻게든 답과 비슷한 걸 찾아 주신건 절대 쉬운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회인에게 그런 관용을 베풀 체력과 정신력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건, 그런 따뜻함이 내가 겪게 될 마지막 자비가 될 거라는 걸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세상에는 많지 않다는 것을 미리 경험한 어른의 포용이었으며, 밖에 나가서 쉼없이 상처받을 제자를 품어준 선배의 아량이었을 것이다. 그런 관용을 베풀어줄 사람이 없는 지금에 와서야 그 깊은 뜻을 깨닫는다.


 누구도 나를 깊이 들여다 봐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달은 서른 살. 이제 스스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래서 나는 교수님이나 회사 따위의 타인이 아닌 미래의 나에게 편지를 써보고자 한다. 아무말이나 늘어놓으면 그 중에 답 하나는 꼭 찾아주던 그 시절 교수님처럼, 미래의 나는 반드시 옳은 답을 찾아낼 것이다. 기필코 잘한 점을 찾아내 지금의 나를 칭찬해줄테다. 역시나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고, 멋있고 대단했다고 샴페인 터뜨리며 서른을 호되게 앓은 나를 위로해 줄 것이다.


사실, 쎈척은 했지만 서른을 일단 틀린 답으로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 무섭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써내려 갈 인생의 이야기가 지루하고, 답이 아닌 것 같아 보이고, 답답한 마음에 조언을 빙자한 잔소리를 하고 싶어도 그 옛날 교수님의 마음으로 가만히 바라봐 주길 바란다. 스스로도 수 백번을 더 흔들리고 후회할지 모르는 내게 기특한 점 하나 잘 한 점 하나 찾아 아낌없는 칭찬을 건네 주길 바란다. 부분 점수가 모여 꽤 괜찮을 성적을 만들어 낸 과거의 나처럼 부분 칭찬에 힘입어 꽤 기특한 삶을 살아내 볼테니 말이다. 완벽한 인생은 아니겠지만, 어차피 백점짜리 인생같은 건 바란 적도 없으니 나는 아무렴 괜찮다.



30±1,

[서른 살, 일단 틀리고 시작하기로 했다]

written by KIM EUNAE

@eunaeem

@mohaebooks

김은애, born in 1993/02/13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 남아있는 모서리에 대한 기록 -이희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