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방송에서 들은 사연이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어떤 청취자의 답에 소위 빵 터졌다.
저는 남편과 연애할 때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어지는 내용은 ‘더욱 더 사랑할 거예요. 후회 없이’ 뭐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 때로 돌아가면…남편과 꼭 헤어질 거예요.
부부의 인연이라는 것은 과연 뭘까. 부처의 <인연경>에서는 오백 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 한번이 스치고, 일천 겁의 인연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게 하고, 삼천 겁의 인연은 하룻밤을 묵게 하며, 팔천 겁이 되어야 부부의 인연이 맺어진다 하였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부부의 인연이 맺어지기까지의 연애 스토리는 모든 부부에게 장밋빛과 함께 감미롭게 추억될 것이다. 대개는 젊고 아름다운 외모 상으로 리즈시절에 아름다운 연애를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 부부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외모 상으로 리즈는커녕 바닥을 칠 때 지금의 남편과 지인에서 연인이 되었다. 여행 중에 남편을 만났다. 중국 신장의 우루무치라는 곳이었다. 실크로드에서 만난 셈이다. 당시 나는 '아리랑로드(아리랑+실크로드)'라는 1인 기업을 세우고 히말라야 석청을 팔겠다며 실크로드를 여행 중이었다. (이후 그 회사의 이름을 따서 큰 아이 이름은 '아로'이다) 당시에도 1차산업, 건강 관련 제품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티벳에서 석청을 채취하는 목표를 달성 후 중국의 서쪽을 거쳐 파키스탄, 인도로 여행할 계획이었다. 남편은 개원을 앞두고 한의원 컨셉을 잡고자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 인생의 궤도 속에서 우리는 잠깐 며칠을 함께 했고 각자의 길을 갔다(여기까지는 오백 겁의 인연, 일천 겁의 인연, 삼천 겁의 인연). 이후 나는 상하이에서 취업할 기회를 가졌고 남편은 한국에서 개원을 했다. 내가 계속 건강했다면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만날 일 없이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상하이 취업과 함께 현지에서 건강검진을 받아야 했고, 어이 없게도 결핵진단을 받았다. 전염성을 없애기 위해서는 결핵약을 복용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결핵을 가벼이 봤고 결핵약도 우습게 봤다. 그러나 이게 웬걸. 결핵약은 내게 너무나 독한 당신이었다. 약 설명서의 효능효과 밑에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가능한 모든 부작용이 나에게 거의 전부 일어났다. 관절이 약해지면서 화장실 변기에 앉았다 일어나는 일,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 손을 짚고 일어나는 일상의 모든 일들이 힘들어졌다. 얼굴은 부어 렌즈를 낄 수 없었고 발도 부어 슬리퍼만 신을 수 있게 되었다.
포부 가득했던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공항직원은 한 눈에 봐도 아픈 사람에게 어찌나 고압적이고 인정사정 없던지, 여권 상의 사진과 다르다며 안경도 벗고 스카프도 벗으라며 소리를 쳤다. 그렇게 벗겨진 내 모습은 참혹했을 것이다.
검색대를 나와 다시 안경을 쓰고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며 비행기를 탔다. 힘이 없어 계속 누워 있었고 그렇게 한국에 도착하자 지금의 남편이 나를 마중 나와 있었다. 당시엔 너무 아팠기때문에 외모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따위는 없었다. 참혹한 모습을 엄마보다 먼저 본 사람이 바로 지금의 남편이다. 가장 예쁠 때가 아닌 가장 엉망일 때의 모습을 본 사람.
바로 다음 날 종합병원에 입원을 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 퇴원 후 그는 나에게 사향공진단 100알을 준비해서 보내주었다. 금박으로 씌워져 고급스럽기도 했지만 일단은 너무 예뻤다. 하루에 한 알씩 100일을 먹으라고 했다. 당시엔 사향공진단이 뭔지도 몰랐고 얼마나 비싼 것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보니 개원 초라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도 않았을 때 무리해서 준비한 것이라 생각하니 뭉클했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어머님께 드린 사향주머니처럼 나에게는 그래서 사향공진단은 단순히 고가의 한약이라기보다는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사랑’이 들어간 약으로 인지되어 있다. '사향'만큼 강한 '사랑'의 치유력을 믿는다. 그래서 아주 힘들 때 공진단을 먹는데(사향은 너무 비싸기도 해서 목향공진단을 먹는다) 사랑의 기억과 기운을 먹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의 사향공진단‘이기도 한 것이 사향은 수컷 사향노루가 후각이 둔하디 둔한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페로몬 주머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주인 최치수를 유혹하여 신분상승을 꾀하고자 했던 귀녀는 사냥꾼 강포수를 돈으로 사 사향주머니를 손에 넣고야 만다. 이렇듯 사향은 남녀의 상열지사를 돋워줄 뿐만 아니라 약성을 몸 구석구석 전달하여 실신한 사람, 기력이 쇠한 사람의 기사회생(起死回生-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남)의 명약인 것이다.
그러나 사향은 ‘향(香)’이다. 향은 날아간다. 사랑이 식는 것과 마찬가지의 속도일게다. 첫 끌림은 향이겠지만 관계의 유지는 이해와 배려, 감사하는 마음일 것이다. 건강 역시 치료를 위해 약에 의존해야겠지만 이후 관리 및 유지는 개인의 생활습관 개선이 필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아픈 시기에 만났고, 여러 부작용을 직접 겪으며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경험을 했고, 한의원을 함께 운영하며 치료와 치유에 힘쓰고, 마음을 담아 약을 달이는 일상을 갖게 된 것은 보통의 인연이 아닐 터이다. 이 정도면 만 겁의 인연일까. 공교롭게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은 소위 사랑의 ‘약발’이 다해 서로에게 서운한 감정이 많은 때이나,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관계의 기사회생을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