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핏 웃었던 것 같다

녹차의 맛

by 이유진
화면 캡처 2023-06-20 122402.jpg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의 초등 동창들은 모두 신입생 딱지를 떼고, 새내기를 맞이하는 상급생이 되어 있었다. 모두들 한해 늦은 나의 입학에 들떠 있었던 것 같았다. 매일 집에 있는 나를 불러내서 일찍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나를 데리고 당구장에 가거나 술을 마시거나 커피숍에서 수다를 떨거나를 반복했다. 그중 친했던 훈이 나에게 입학 선물로 뭘 해줄까 고민하다가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나섰다. 친구들도 모두 입학 전에 소개팅 딱지는 우선 떼야하지 않겠나 바람을 잡았다.


훈은 두 명의 친구, 송과 전을 데리고 나왔다. 고등학교 동창인 셋 중 훈을 제외한 송과 전은 같은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우리 넷은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엘 갔고, 신나게 놀았다. 그러다 훈은 슬쩍 나의 귀에 대고 송이 원래 네가 만날 친구였다며 전은 그냥 약속이 겹쳐서 이렇게 됐다고 설명해 주었지만, 이미 내게 소개팅이라는 의미가 없어진 다음이었다.


신나게 놀고, 전을 보낸 후 훈과 송과 나는 같은 버스를 탔다. 우리 셋 모두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었나? 훈과 내가 둘이 나란히 앉았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훈과 송은 할 말이 남았다며 한 정거장 먼저 내린다고 일어섰다. 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고, 잘 가.라고 인사하며 훈과 송이 내렸는데, 순간 갑자기 송이 버스 위로 튀어 올라와 내게 뭘 던지고는 다시 재빠르게 내렸다. 당황하며 내 손을 보니 송이 던진 꼬깃꼬깃한 쪽지가 있었다. 송의 이름과 삐삐 번호 그리고 그때 한참 유행하던 PC통신 하이텔 아이디가 적혀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창밖의 송은 이미 어둠 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송의 커다란 얼굴을 떠올리고 얼핏 웃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송은 입학 선물을 사주겠다고 연락을 해왔고, 제법 선배인 티를 내고 싶어서 나의 시간표를 만들어주고, 3공 노트도 사주고, 내 친구들 미팅도 시켜주고, 엠티 가서 술에 취해 전화도 하며, 얼마 동안 제법 친구인 티를 내주었다.


사진 폴더를 보다가 저장되어 있는 이 사진을 발견했다. 하지메가 좋아하던 여학생 아오이에게 우산을 던져주고 버스에서 내려 비를 맞으며 좋아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그때도 이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리고 내게 있었던 그 시절 송이 던진 쪽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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