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2년 가을학기부터 지금까지 대학에서 강의를 해오고 있는데. 수업을 통해 만나게 되는 학부생들은 해마다 급격히 달라지는 느낌이다. 특히 연기를 전공하는 배우 지망생들은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수년 전만 해도 연극학과 학생으로서 연극을 할 것이냐, 방송을 할 것이냐라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하곤 했다. 배고프지만 예술이라는 연극을 할 것이냐, 구질구질한 삶을 벗어버리고 산뜻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줄 방송을 할 것이냐.
그런데 해가 갈수록 학생들은 그런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연예계로 진출하고자 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갈등하지 않는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능력만 된다면 뮤지컬이든, 대사극이든, 영화이든, TV이든, 가수이든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영화배우이든, 가수이든, TV 탤런트이든, 그들이 뮤지컬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해 거부감도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원할 수 있다는 공평한 생각을 하면서 그런 면에서는 너그럽다. 무대 예술과 연예의 차이점을 굳이 구분하지 않는다. 이들은 연극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보다 자신이 어떤 분야에서 성공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에 몰두한다. 개인적 성취욕을 탓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배우라는 존재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런 것을 왜 고민하는지 되물을 것 같다. 어차피 세상은 그렇게 변화해가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이렇게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넘나들면서 성공하고자 하는 이들은 자신을 상품화시킬 수 있는 소속사를 찾는다. 소속사는 상품화할 만한 엔터테이너를 찾는다. 서로 의기투합하여 돈을 번다. 한 명의 엔터테이너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 수록 쓸 수 있는 분야가 많아지고 그것은 곧 경제적 수익이 되기 때문에 ‘만능 탤런트’를 선호하고 그들이 더 가치를 지닌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분야로 그들을 띄우기 위해 그 연기자의 이미지를 만든다. 이러한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 속의 연기자들의 활동을 보고 자라는 세대는 연기란 돈과 명예를 선사해주는 직업이요, 사업일 뿐이다. 그래서 유명 연예인들과 비슷해지려 노력한다.
배우는 무대에 서는 순간(다른 장르에서는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일종의 가면을 쓴다. 인물을 창조하면서 자신의 원래 모습은 감추어진다. 가면은 본질을 감춤으로써 본질을 드러낸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알려진 개인의 본질을 감춤으로써 숨겨진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드러낸다. 자신의 본질을 숨길 수 있다면 과감히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다. (목욕탕에서 불이 나서 벌거벗고 탈출을 해야 한다면 몸의 부끄러운 곳을 가릴 필요가 없다. 얼굴만 가리면 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한다면 그 익명성을 이용해 평소에는 하지 못하는 짓을 할 수 있다. 지킬과 하이드, 배트맨, 영화 마스크(짐 캐리(Jim Carrey)가 주연한), 오페라의 유령, 조로(Zorro) 등이 이러한 가면의 본질을 이용한 이야기들이다. 가면을 쓴다는 것은 인물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무대 예술을 위한 분장은 단순히 조명을 잘 받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창조하는 데에 일조를 하는 것이다. (그러한 분장이 극대화되어 가면의 기능까지 하는 것이 중국의 경극이나 일본의 가부키의 분장이다.) 가면을 이용하는 전통적인 축제나 공연에서는 그 탈일상적인 놀이가 끝이 나면 그 가면을 없애버렸다. 원래 봉산탈춤에서 극이 끝나면 탈들을 불에 태워 없애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가면을 없애버리는 것은 그 가면이 현실 세계에서는 위험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축제에서 허용된 놀이의 법칙은 그 탈일상의 행위가 끝이 나면 효력을 잃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이 지켜질수록 축제와 공연의 탈일상의 가치가 커진다. 마치 열심히 일한 사람이 더 휴가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처럼. 놀이의 법칙과 일상의 법칙은 다르다. 그것은 서로 존중되어야 하며 그것이 무너질 때 범죄가 되거나 반칙이 된다. 그런데 많은 연기자들이 현실 생활에서 이 가면을 벗지 않는다. 가상 세계, 즉 드라마의 세계에서 자신이 연기한 인물의 이미지를 벗지 않는다. 어쩌면 예술이라는 것은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기 예술은 모방의 놀이에서 발전된 것이다. 본 에세이의 ‘왜 하필 뮤지컬인가?’(3회에서 5회)에서 언급했던 『놀이와 인간(Les jeux et les hommes)』의 저자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는 그 책을 통해 놀이를 네 개의 주요 항목으로 구분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것들은 아곤(Agon), 알레아(Alea), 일링크스(Ilinx) 그리고 연기 예술이 속하는 미미크리(Mimicry)이다. 이것들은 그 차례대로 각각 경쟁, 운, 현기증, 모방을 뜻한다. (나는 인류학자는 아니지만 이들에 퍼즐류의 놀이도 더하고 싶다. 스도쿠, 낱말 맞추기, 조각 퍼즐 맞추기, 컴퓨터 윈도즈 프로그램에 있는 카드로 된 놀이 등의 정신적인 유희를 충족시키는 놀이들.) 그리고 이 네 가지로 구분된 각각의 놀이가 타락할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 보여주는데, 경쟁이 타락하면 폭력 등으로, 운이 타락하면 미신 등으로, 현기증이 타락하면 마약중독 등으로, 모방이 타락하면 이중인격 등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한다.
놀이가 타락하는 것은 일상과 탈일상을 구분하지 못하여 놀이와 현실 세계의 경계선을 침범하여 현실 세계의 법칙을 어길 때이다. 이 모방 놀이를 즐기는 사람이 그것을 놀이, 즉 예술 행위를 넘어서 현실 세계에도 그대로 유지할 때, 사기꾼이 된다. 자신을 가상의 인물로 만들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러한 사기 행위를 많은 연기자들이 하고 있다. 하나의 극에서 만들어진 인물의 이미지를 현실 세계에서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가면을 벗지 않는 것이다.
배우는 연기를 하고 난 후, 현실 세계로 돌아올 때는 이 가면을 벗을 수 있어야 한다. 가면을 벗고 인물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현실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일상의 세계와 탈일상의 세계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배우가 아닌 이들이, 신문이나 인터넷에 오르는 사람들이 아닌 이들이 사는 세계 속으로 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겸손함으로 들어와 함께 살 수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섞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배우에게 연기를 위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소속사의 사무실에서 제공하는 밴(Van) 속에 숨어 신비적인 이미지를 지켜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치열하고 땀내 나는 삶을 살아보지도 않고 인물을 창조한다고 한다. 정말 우스운 이야기이다. 색이 다양해야 다양한 색이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몇 가지 색만으로도 섞어서 여러 색을 만들 수는 있다. 섞는 것도 능력이다. 하지만 준비된 색이 많을수록 더 다양한 색 표현이 가능하다. 어떤 화가는 화방에서 파는 물감을 쓰지 않고 자신만의 도료를 만들기도 한다. 자신만의 재료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드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한다. 배우는 다양한 삶을 경험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경험을 직접 할 수는 없다. 그래서라도 삶에 진지해야 한다. 삶에 대한 진지함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경험을 잘 이용하게 해 준다. 그리고 삶에서 얻은 경험을 잘 섞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극에서 이미지를 얻은 많은 연기자들이 그 가면을 벗지 않고 자신의 실제 삶에서도 그 가면이 준 이미지를 깨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이들은 집 앞 가게에 갈 때에도 옷을 갖추어 입어야 하고, 화장-또 하나의 분장이 되는-을 해야 한다. 자신의 맨얼굴을 감추기 위해 모자를 눌러쓴다. 그리고 그 이미지를 아예 성형수술로 얼굴과 몸에 박아버린다. 배우는 여러 가면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하나의 가면을 고정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미지 변신을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연기는 몸으로 보여주는 것인데, 그 몸을 고정화시켜서 어떻게 이미지 변신을 한다는 것인가. 삶 자체가 가짜이다. 가면이 극 속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지만 현실에서는 이중인격과 같은 가식적인 장치가 될 뿐이다.
참으로 불쌍하다. 디지털카메라가 흔한 이 시대에 더 불쌍하다.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배우’가 아닌 상업적인 필요에 의해 고용되는 ‘연기자’라니! 소속사들은 그들의 상업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들의 실제 삶을 철저히 감추고 관리한다. 젊은 연기자들일수록 그런 관리에 얽매인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으로 배우는 배우 지망생마저도 빠른 성공을 위해 좀 얽매이더라도 소속사에 들어가려고 애쓴다. 얽매이고 싶어 한다. 이러한 젊은 배우 지망생에게 뮤지컬 배우의 3박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자주 생각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대학의 뮤지컬 관련학과에서도 춤과 노래 그리고 장면 연습을 통한 연기 훈련을 제공하지만 뮤지컬 배우를 초월하는, 배우로서 갖추어야 할 그 무엇을 배울 수 있는 교육 내용을 제공하지 않고 있고, 그렇게 짧은 기간에 만들어진 연기자들이 학교 졸업 후, 심지어 재학 중에 프로 무대에 서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들은 그 가면을 벗지 않는가? 그것은 그 가면을 쓰고 있으면 현실 세계에서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많은 연기자들이 그런 대접을 포기하지 않는다. 아니, 적극적으로 유지하려고 애쓴다. 유명해진다는 것은 얼굴이 알려지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는 그 유혹을 떨쳐내야 한다. 연기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묻곤 한다. 극 속의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보여주는 배우가 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연기자로서 유명해져서 그 이후에 따라오는 좋은 차, 좋은 집, 세상의 관심을 원하는 것인지. 돈을 버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배우로서 산다는 것에 대한 진지함에 대한 자극을 주는 것이다.
배우가 된다는 것은 극 속에서 인물을 창조하는 일을 직업으로 한다는 것 이상의, 배우로서 산다는 의미가 있다. 배우는 사실, 사회적 약자이다. 방송이나 영화를 통해 유명해진 배우들이 사는 것을 보면 배우가 어떻게 사회적 약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 유명함은 당장 다음 달이면 식을 수 있고 수년 뒤에는 아예 대중에게 잊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한 번 인기를 얻으면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초조해한다. 배우로 살면 의료보험, 해외 비자, 은행 대출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나는 지금 방송의 인기 연예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나는 연기자라는 단어와 배우라는 단어를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다.) 배우로서 산다는 것은 자신의 몸뚱이 하나로 세상을 맞서고 그럴수록 당하는 약자의 서러움을 삶으로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으로 세상을 향해하고 싶은 이야기를 던진다.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얻는 삶의 경험들을 통해 더욱 훌륭한 인물을 만든다. 기꺼이 자기 자신을 세상과 관객에게 내어 준다. 가진 게 없다. 연기하는 순간 꽃처럼, 불처럼 피어났다가 극이 끝나면 자신도 가면을 벗고 나와야 한다. (바로 이점 때문에 무대 연기가 아름답지만 허무한 예술일 것이다.)
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이 1950년에 만든 영화 선셋 블러바드(Sunset Boulevard)는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이제는 한물간 늙은 여자 영화배우 노마 데즈먼드(Norma Desmond)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가 음악을 쓰고 돈 블랙(Don Black)과 크리스토퍼 햄튼(Christopher Hampton)이 가사를 써서 1993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했다. 노마는 잊힐수록 커져가는 자존심을 가지고 대저택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그녀가 어떤 계기로 오랜만에 파라마운트 영화사를 방문하는데 그때 두근거리는 심정을 묘사하는 노래가 As if we never said goodbye이다. 그 노래의 맨 마지막 가사가 이렇다. “WE TAUGHT THE WORLD NEW WAYS TO DREAM.” 배우는 세상이 꿈을 꾸는 법을 자신의 몸을 던져 말해주는 존재이다. 자신의 부와 명예가 배우의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꿈을 보여주고 확신시켜주는 것이 그 목적이다. 물론 노마라는 인물은 명예를 원했다. 하지만 뮤지컬의 훌륭한 작사가들은 그것 이상의 것을 가사로 표현했다. (위의 가사는 내가 좋아하는 가사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