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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성일 Jan 10. 2019

제8회 - 뮤지컬 배우의 3박 자라는 함정 (1)

 “뮤지컬 배우는 춤, 노래, 연기 3박자를 고루 갖추어야 한다.”... 내가 가장 진부하게 생각하는 말 가운데 하나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뮤지컬 배우는 춤, 노래, 연기를 다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3박자’가 뮤지컬 배우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 세 가지는 강조하지만 배우에게 더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그래서 진부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 중요한 그것이 무엇인지 단답식으로 듣고 싶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은 귀찮을 산책을 해보자. 그래도 산책하면서 땀을 흘리면 건강해지는 느낌이 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학부에 다닐 때만 해도 ‘뮤지컬 배우’들과 이른바 ‘정극 배우’들 사이에서는 약간의 신경전이 있었다. (사실 뮤지컬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정극’이라는 말 자체도 나에게는 실소가 나오게 한다.) 정극 배우들은 대부분의 뮤지컬 배우들이 연기를 너무 못한다고 나무라듯이 한탄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움직이는 방법, 대본 분석, 교감, 발성, 화술, 발음 등 연기의 기초적인 것들에 대한 훈련이 너무나 안 되어 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사실이었다. 당시 뮤지컬 전문 배우를 선언하며 무대에 서기 시작했던 배우들 가운데 어떤 배우들은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기초가 되어있지 못했다. 연극이라는 예술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그 당시 대부분의 정극 배우들은 연극 무대에 오랫동안 서왔던 선배이든, 선배님들을 모시고 혼이 나면서 연기를 배우는 후배이든 무대에 선다는 것에 대한 ‘성스러움’을 먼저 따졌다. 그런 그들이 보기에 뮤지컬 배우들은 싸구려였다. 뮤지컬은 늘 경박하고, 상업적이고, 진지하지 못해 보였고 그런 무대에 선다는 것 자체가 배우로서 진지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뮤지컬 배우에 대해 알레르기 같은 반응을 보였다. 반면에 뮤지컬 배우들은 정극 배우들이 연극에 대한 진지함을 추구한다는 우월감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벽을 만들어서 연극을 지루하게 만든다고 했다. 연극을 입으로만 하느냐고 무대 위에서 한 번 겨뤄보자는 식으로 당돌하게 맞섰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정극 배우들은 배우들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조건인 뮤지컬 배우만큼의 춤과 노래 실력은 없었고 뮤지컬 배우들은 정극 배우들이 갖추고 있었던 연극에 대한 진지함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뮤지컬 배우들 역시 알레르기 같은 반응을 보이게 만드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영화배우나 가수, TV 탤런트로 활동하다가 뮤지컬에 출연하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뮤지컬 무대에서 십 년 이상을 뛴 사람들을 제치고 오디션도 없이 하루아침에 주인공으로 발탁되곤 했다. 이들의 뮤지컬 무대 진출은, 정극 배우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뮤지컬의 불모지를 개척해온 뮤지컬 배우들 입장에서는 낙하산 부대의 침략이었던 것이다. 이 ‘스타’들에게는 뮤지컬 출연이 제작사와 소속사 사이의 계약 관계에 의해서 출연을 하는 것일 뿐이었으며 그들 자신이 뮤지컬 배우들의 후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터주 대감인 뮤지컬 배우들에게는 괘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대 예술의 배우들 간의 선후배 관계는 늘 엄격했는데도 이들은 어차피 뮤지컬계 사람이 아닌 연예계 사람들이기에 연예계의 시각으로는 상품성 떨어지는 뮤지컬 배우들에게 굳이 굽실거릴 필요도 없었다. 어쩌란 말이냐, 이 스타들은 뮤지컬 무대에서 땀을 흘려온 자신보다 수백, 수천 배를 벌어들이는 사람들인데. 연습이 끝나면 소속사의 차를 타고 집에 가버리고 술자리에도 좀처럼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선배로서 목에 힘줄 수 있는 기회마저 주지 않는다. 게다가 놀랍게도 몇몇 선생님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던 개인 분장실을 배정받기도 한다. 몇몇 사람들(그래도 자신은 무대에 근거를 삼고 있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뮤지컬 배우와 방송 스타는 엄연하게 구분이 있었다. 그래서 뮤지컬 배우 역시 정극 배우들이 자신들을 평가하던 그 잣대로 무대의 ‘성스러움’을 모르는 그 스타들을 욕하곤 했다.    


 장황한 위의 이야기들은, 조금은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이 담론들, 즉 뮤지컬 배우와 정극 배우 사이의 그런 신경전과 스타들의 뮤지컬 출연에 대한 비판은 지금의 한국 뮤지컬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는데 공헌을 한 배우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현대극장, 극단 대중, 민중, 광장, 후에 서울예술단으로 명칭이 바뀐 88 서울예술단, 역시 후에 서울시 뮤지컬단으로 명칭이 바뀐 서울시립가무단 그리고 롯데월드 예술극장 등에서 활동한 배우들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을 준 예그린 악단까지 당연히 거슬러 올라가야겠지만 동시대의 젊은 뮤지컬 주 관객층에게 예그린 악단은 너무 멀게 느껴질 것이다.) 이 시기에 뮤지컬 무대 위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그리 많지 않아서 어느 정도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은 배우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거의 다 알았다. 그런데 요즘은 이들의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수많은 배우들이 대학로를 채우고 있다. 그들의 계보는 제법 다양하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연기를 가르치는 대학의 학과 출신, 뮤지컬계로 진출하는 것이 예전보다 자연스러워진 성악과와 무용학과 출신, 전공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오디션을 보면서 성장하는 배우,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 등. 이 젊은 배우들은 장르를 넘나드는 것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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