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거짓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짓말의 거짓말 May 10. 2017

뜨거운 맥주

잠에서 깬 뒤 머리맡의 디지털시계를 본다. 보통의 40대 가장이라면 옆에서 자고 있어야 할 아내의 존재 여부에 대해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그런 의미의 보통의 가장이라면 나는 보통의 가장은 못 되는 셈이다. 시계의 숫자는 P.M 11:24를 가리키고 있다. 집의 침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푹신하고 보드라운 삿포로 어느 한 호텔의 베드룸이다.


양치를 하지 않고 잠든 뒤의 묘한 텁텁함과 불쾌함을 제거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고 버드와의저의 캔을 잡는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한 겨울이지만 호텔 안의 공기는 반바지를 입어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다. 하지만 한 손에 쥔 맥주의 감촉은 역시 차다. 세상이 아무리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고 해도 뜨거운 맥주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재미없는 세상이다,라고 생각한다.


뜨거운 맥주가 나온다고 한다면 일 년에 한 번 있는 가족 야유회 때라 던가, 특별한 날에 코카콜라 선전에나 나올법한 사파리의 흰 곰들을 보며 아내와 뜨거운 맥주 한잔을 하거나, 여자에게 스무 번째로 차인 날이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이브라면 한 잔 정도쯤은 뜨거운 맥주를 마시는 것도 굳이 나쁘지는 않을 텐데. 


아, 물론 가족 소풍으로 사파리에 갈 때는 아이들용의 따뜻한 코코아를 담은 보온병이 따로 필요할 것이다.


버드와이저를 한 모금 목에 넘긴다. 차가운 맥주 특유의 톡 쏘는 느낌이 좋다. 아마 뜨거운 맥주 따위 나온다고 해도 뜨거운 맥주의 광고 앞뒤에 어떤 광고주가 광고를 하길 원할까? 혹시나 도수가 0도인 최고급 특제 와인(이미 와인이 아니다)의 광고라거나, 40대에 접어든 가장이 모처럼만에 의기투합해 부부여행을 온 외국의 한 호텔에서 도망가 버린 아내를 찾는 광고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베드룸의 문을 연다.


아내는 삿포로 호텔의 거실 소파에서 온 더락의 위스키와 함께 호텔에서만 제공하는 특별 채널의 TV프로를 감상하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잠깐 이쪽을 바라보고는 다시 TV의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뭐 좀 먹겠어? 이제부터 샌드위치를 만들 건데.”
“고마워요.”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어 아내 몫의 치즈 샌드위치와, 내 몫의 참치 샌드위치를 하나씩 만들어 접시에 담고 쟁반에 올린다. 쟁반에는 내 몫의 버드와이저와, 아내 몫의 칠레 포도주가 함께 있다. 소파의 앞에 있는 무릎 높이의 테이블에 쟁반을 놓고 아내의 옆에 앉는다. 아내의 빈 잔에 포도주를 채우고 버드와이저의 캔을 딴다. 말없이 맥주를 한 모금 넘긴다. 이런 경우 좀처럼 침묵은 깨지지 않는다. 부부 사이에 말이 없을 때 평범한 가장이라면 먼저 말을 걸 것이다, 고 생각한다.


“뜨거운 맥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응? 뭐라고요.”

“뜨거운 맥주 말야. 만약 뜨거운 맥주가 있다면 어떨까? 가령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보온병에 아이들 몫의 코코아와 함께 뜨거운 맥주를 챙겨서 사파리로 가족 소풍을 가는 거야.”


음. 글쎄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하고 아내가 말한다.


“뜨거운 맥주가 나온다고 해서 내가 그것에 돈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겠다고 생각해요. 가령 일주일에 세 번씩은 꼭 잠자리를 함께해야만 하는 40대의 부부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굳이 있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도 조금 들지만, 뭐 뜨거운 맥주 같은 것이 하나 정도 있다고 해서 나쁠 건 없죠. 세상에는 있어야만 하는 것보단 없어도 되는 것이 더 많으니까요. 가령 이 호텔 주방에 있을지도 모를 바퀴벌레라거나, 당신의 재미없는 소설처럼요.”


"...."


“그럼 이제 미안한데 잠깐만 나를 내버려두실 수 있겠어요? 호텔에서 20년 전에 유행했던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상영해 주고 있거든요. 조금만 있으며 끝날 거예요. 심심하면 잠깐 밖에 외출이라도 하고 오세요. 아. 그리고 기분 상했다면 이해해요. 그냥 당신의 글에 나오는 비유들을 흉내 내 본 것뿐이니까. 세상에는 저 같은 독자도 있어야지 않겠어요? 항상 재미없다고 투덜대지만 언제나 소설가가 직접 주는 선물도 마다하고 자기 돈을 지불하고 소설을 사서 보는. 아니. 미안해요. 소설을 사는.”


그렇다. 나는 아내에게 재미없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아내가 과연 자신의 소설을 정말로 읽고 서는 그런 말을 하는 건지 확신하지도 못한 채 소설을 쓰고 있는 그런 작가가 되었다. 그러면서 지치지 않고 다음에는 뜨거운 맥주에 대한 이야기를 써 볼까라고 잠시 생각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접어버리는.....


(2005. 11)

매거진의 이전글 첫 경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