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엄마는 알을 깨고 세 번 태어났어

작가의 말, 엄마의 고백

by 인생정원사

“정원아, 엄마는 세 번 태어났단다. 신기하지? 오늘은 우리 정원이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줄까 해. 오늘 밤은 긴 밤이 될 거 같으니까. 아, 그런데 말이야, 정원이에게는 조금 재미없을지도 모르지. 벌써 밤 열한 시인데. 우리 정원이 눈이 초롱초롱하니 아무래도 늦게 잘 거 같네. 그럼, 시작해 볼까. 엄마가 혼잣말도 아주 잘한단다. 자, 아가야, 이리 오렴. 잠들 때까지 토닥토닥해 줄게. 괜찮아, 오늘은 천천히 자렴. 이야기해줄게. 옛날 옛날에…….”

저는 세 번 다시 태어났습니다. 데미안의 알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저의 세계는 그 순간마다 많이 바뀌었지요. 마치 웅크리고 살다가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요.


첫 번째 탄생―‘뿌리 엄마’가 되다.

삼남매의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아이로 살았지요. 판타지와 만화 같은 ‘이야기의 세계’에 푹 빠져서 그 상상을 친구 삼아 제법 즐거웠지요. 세상은 모호하고 불투명한 것들 투성이었지요. 사실 저에게 사람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본능적으로 따뜻한 의지처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고, 삶의 온기를 누리면서 베란다의 식물도 늘었습니다. 아이가 생겼어요. 초음파 사진을 보면서 그 아이와 무엇을 할지 꿈꾸었습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아이는 태어났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처럼 아이는 웃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뽀얗고 옅은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운 아기를 만났습니다. 비로소 저는 사랑을 알았어요. 그 순간 ‘뿌리 엄마’로 다시 태어났어요. 엄마가 되니 세상은 더 이상 불투명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이를 사랑했지만, 가끔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것이 '뿌리 엄마'로서 잘못된 것 같아 스스로를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매 순간이 힘든 육아였지만 왜 힘든지 몰랐어요. 겨우 가진 따뜻한 선명함을 지키려고 있는 힘껏 웃었습니다. 사이사이에 있는 기쁨을 애써 잡았지요.


“응? 밥 달라고? 새벽 2시인데. 아휴, 소화가 다 돼서 배고프구나. 그럼, 엄마가 밥이랑 국이랑 조금 줄게. 요것만 먹고 자자. 그래그래. 이것만 먹고 얼른 자자. 잠꾸러기! 이제 졸리는구나. 하품하는 거 보니. 배부르면 엄마도 졸려.”


두 번째 탄생―‘정원이 엄마’가 되다.

고이 키웠던 뿌리가 자폐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의 세계는 또 바뀌었지요. 선명했던 세계에도 뒷면은 있었습니다. 그렇게 ‘뿌리 엄마’에서 ‘정원이 엄마’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한참을 정원이 엄마로 살았습니다. 아이의 마이크처럼 목소리를 대신하고 손과 발이 되어 살았지요. 기쁨과 슬픔은 정원이와 모두 동기화되었습니다. 아이에 대한 나무람은 저에 대한 나무람으로 느껴졌습니다. 마음의 탯줄은 끊어지지 않고 더 단단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때는 아마도 어떻게든 정원이가 아닌 뿌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을지도 모릅니다. 매일매일의 일상을 예쁜 모습만 골라 SNS에 올렸습니다. 다름을 글로 공유하고 순간을 기록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제가 쓰는 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았거든요. 침묵하고 기록되지 않은 채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아, 이제 침대로 가자고? 그래, 가자. 이제 엄마 이야기는 다 끝났어. 날이 좀 덥네. 여름이라서 그런가 봐. 이렇게 늦게 자도 내일은 일요일이니 다행이지 뭐야. 늦잠 잘 수 있겠다. 모레는 학교 가야 하니 내일 밤은 좀 일찍 자줄래. 코― 하고 자자, 엄마가 잠들 때까지 팔베개해줄까. 팔은 긁지 말자. 알았지? 어휴, 벌써 세 시 반이다. 불 끄고 자야겠다. 엄마도 너무너무 졸려.”


세 번째 탄생―‘정원사’가 되다.

정원이를 키우는 하루는 여전히 길었고 발걸음은 무거웠습니다.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더 이상 24시간 ‘정원이 엄마’로 살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 자신을 찾고 싶었습니다. 아이가 저를 옭아맨 밧줄처럼 느끼기도 했습니다. 먹고 자고 쉴 자유가 당시에 없었거든요.

옆에서 웃고 정원이의 눈은 태어났던 그날의 ‘맑음’을 그대로 담고 있었습니다. 아.. 내 아이였고, 사랑하는 뿌리였으며, 정원이였습니다. 오물거리는 입은 여전히 예뻤습니다. 아이는 자신의 세계를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주 기쁘고 충실하게 노력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전 ‘정원이 엄마’에서 ‘정원사’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걱정이 희미해졌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모호하지도 선명하지도 않았습니다. 눌러왔던 마음이 차올랐습니다. 눈물이 세상에 번졌지요. 눈물은 글이 되었습니다.


불투명했던 시절, 지나치게 선명했던 꿈, 어떻게든 이겨내려 했던 아픔을 모두 깨고 저만의 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정원이 덕분에 ‘뿌리 엄마’이자, ‘정원이 엄마’, 그리고 ‘정원사’로 태어났지요. ‘살아 있음’의 진짜 의미는 아이가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알을 깨고 다시 태어나는 고통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애써 쌓아 올린 탑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저만의 세계를 여는 시간은 힘들었지만 고통스럽진 않았어요. 제 손은 여전히 거뭇한 상처가 있었지요. 지난날의 정원이 엄마의 ‘눈물’과 뿌리 엄마의 ‘웃음’은 탑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물었습니다.

‘이렇게 애쓰며 사는 게 끝이 보이지 않는 일처럼 힘들지 않냐’고. 저는 답했습니다.

‘의미 있는 삶 안에서 저의 세계를 꾸려가고 있답니다.

매 순간 열심히 기쁘게 살아가는 정원이에게 늘 배우고 있어요.’


“어머, 우리 아기 잠들었구나. 언제 잠들었지. 옛날 생각하느라 몰랐네. 엄마가 딱 너에게 고맙다는 이야길 하려는 참이었는데. 재미없었지. 우리 정원이 잠든 속눈썹이 참 이쁘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게 네 속눈썹인 거 너는 알까. 엄마는 너랑 비 냄새가 섞인 바람을 맞는 것도, 맨발로 운동장을 걷는 것도 좋아한단다. 엄마는 새벽의 푸른 어스름도 좋아하는데, 이렇게 정원이가 늦게 자니 엄마도 같이 늦잠꾸러기네. 아, 아가야! 엄마 등에 꼭 붙어 잠든 너의 볼이 참 좋아. 고마워. 정원아, 좋은 꿈 꾸렴!”

저는 동아줄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의 알이 깨어지고 ‘나’의 세계가 다시 만들어질 때마다 아팠습니다. 익숙한 시절은 편안했고, 앞으로 나가는 것은 고됐습니다. 위태로운 순간마다 ‘마음의 동아줄’을 잡으며 견뎠습니다. 동앗줄은 마당에 심은 침엽수이기도 했고, 제가 그리는 그림이기도 하고 병원에서 받는 치료이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엄마의 동아줄’에 대한 이야기도 기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원아, 엄마는 늘 너를 응원한단다. 우리 아침이 오면 늦여름 정원을 나가자. 내일이 오면 희끄무레한 장미꽃잎도 따고 강아지풀을 빙글빙글 같이 돌리자꾸나. 사랑해 내 작은 정원.’






keyword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