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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왜, 자폐에 대해 쓰나요?

내가 ‘정원이의 세계’를 쓰는 이유

by 인생정원사


성인 중증자폐 남자 아이와 살기 어렵단 글을 보았습니다. 정원이는 이제 만9세이고 중증 자폐아이입니다. 그 시기는 멀리 있지만 또 가까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중증자폐를 하루아침에 경증으로 만드는 기적을 바라진 않습니다. 그저 정원이를 포함한 우리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미래를 찾길 바랄 뿐이죠. 그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 옆에서 천사처럼 곤히 예쁘게 잠든 아이를 보며 생각이 많아지는 밤에 쓴 글을 모아서 정리해보았습니다. 닿지 않은 미래가 걱정이면서도 일단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지 않을까 애써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끔 누군가 묻습니다. 왜 글로 이렇게 어렵게 쓰냐고, 사진 한 장 동영상 한 장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그렇네요. 저는 왜 이렇게 구구절절 아이 이야기를 이렇게 열심히 쓰는 것일까요?


1. 감정을 걷어내고 부모부터 존중의 마음으로 씁니다.

저는 아이가 중증자폐이지만 힘들다는 글은 최대한 다듬어 쓰고 있습니다. 물론 현실은 화날때도 많죠. 예를 들어 섬유유연제를 거실에 쏟을 때라든가, 아껴쓰는 율무비누를 물에 담가서 1/10로 작아졌다든가..

그래도 최대한 감정을 걷어내고 쓰려고 합니다. 내 아이를 존중하는 것은 부모부터 시작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별개로 나의 힘듬을 숨기지도 않지요. 따로 분리해서 적고 있습니다. (심지어 브런치북에 연재중.. ‘새벽고담’이라고). 그리고 아이의 어려움을 낙관적으로만 쓰지 않습니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정원이를 키우며 별의별일을 다 겪었지만 상대를 비난하는 말은 적다가도 보관으로 돌리고 삼키고 맙니다. 그말을 해서 파생되는 논쟁이 내 에너지를 뺏어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정리된 글이 지금 쓰는 글처럼 결국 밋밋해집니다. 또 어떤 감정은 시간이 지나야 제대로 쓸 수 있기도 했고요. 겪는 것을 모두 적을 순 없었어요.



2. 장애이해, 연대와 지원 사이의 묘한 줄다리기

저는 정원이를 낳고 세상의 양면 혹은 뒷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생각을 나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야기하는 것, 소리내어 외치는 것은 꼭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꾸준히 알려내는 것이지요. 최근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결국 정답은 없다는 것입니다.

통합교육과 특수교육, 정답은 없어요. 사람 그리고 그 사이의 유연함이 중요해요.

정원이 역시 통합학교 두번에 특수학교로 전학왔습니다. 아이가 하지 않아도 될 스트레스를 겪으며 전신발작을 초등학교 입학 이후 두번 했지요. 결국 2학년 초 지적 동반 자폐성 장애에 이어 뇌전증까지 확진 됐습니다. 스트레스가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통합을 무리하게 견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통합의 제도는 유연하지 않았어요. 물론 함께 서로를 겪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었지만 개별화란 이름의 옷은 하나의 사이즈였거든요.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죠. 그리고 그 영향은 아이 뿐만 아니라 저도 겪게 됐습니다.

장애이해는 그래서 장애를 만날 수 있는 비장애인 사회구성원 전체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현실은 물론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입장에서 보면 나 역시 기본적인 지식을 알았다면 정원이의 조기개입 과정애서 시행착오가 덜 했으리라 보고 있어요. 알아가는데 받아들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마찬가지로 통합학급의 구성원으로 확정된 이후, 사후적으로 문제상황를 가늠해보고 실시하는 장애이해교육은 특수교육대상자에게도, 학급구성원에게도 이미 시행착오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되는 거죠.

장애이해 교육은 장애 안에서도 있어야 합니다. 장애라는 카테고리로 묶여있지만 각각 장애의 중증도도 신체장애냐 정신장애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당사자 안에서도 서로의 다름에 대한 이해도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행장애에 대한 정의도 정신장애도 포함된다는 걸 모르죠. 이는 정책문제에 대응할때 틈을 만들게 됩니다. 각각의 처한 상황, 중증도, 장애의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필요로 하는 것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통합과 특수교육, 탈시설과 시설 모두 같은 맥락입니다.



3. 침묵과 여백, 싸우지 않고 설명하려 했어요.

“널 장애아이 엄마로 대한 게 아니야.”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뜻은 저를 저란 사람으로 대했단 말이죠. 그러나 그렇다 해서 정원이가 하루아침에 장애를 벗거나, 혹은 제가 정원이 엄마가 아닌게 아닙니다.

그 말은 꼭 정원이를 아이가 장애인 것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를 나로 대해준다 해서 현실이 바뀌지 않습니다. 저는 특수한 대우를 원한건 아니지만 전혀 다른 일상을 살아가는 것은 알길 바랬어요. 결국 그 말을 한 친구는 아무리 소중한 인연이라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저자신의 현실에서 이야기를 해야만 하니까요.

도움은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켜봐주는 것입니다. “삶을 긍정적으로 살아라.”란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도리어 되묻고 싶었지요. "당신이 내 상황이라면 이만큼 견딜 수 있을까요."라고. 그러나 묻지 않았습니다. 정원이가 1월초에 10일간 곡기를 끊었었습니다. 작년 1월에는 6주간 걷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그때는 도무지 긍정적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최대치의 낙관으로 이미 살고 있거든요.

저는 아이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 정원을 가꾸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고 있지요. 하루의 충실함을 격려하는 이야기들을 계속 적다보면 이 거짓말 같은 현실도 긍정을 담아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선의의 말이 도리어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어쩌면 침묵과 여백이 더 중요할 때가 있지요. 아무리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어도 이제는 바로 토해내지 않아요. 부정적인 감정은 좀 묵혔다가 쓰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빈자리가 무력함, 슬픔, 우울감을 줄여나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저는 제 삶을 밝다 여기지 않습니다.

골골대기도 하고 자주 넘어졌다가 울기도 하지요

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자주 아픕니다. 그런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반갑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순 없으니, 싸우기보다는 설명하려 했습니다. 읽어주지 않아도 글로 남기기로 했다. 정원이를 위해. 제가 글을 쓰는 이유랍니다.


* 수정하면서 문맥이 이상한 부분은 틈틈히 고치고 있습니다. 리얼타임으로 글을 쓰고 생활을 해나가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브런치북 <자폐를 가진 정원이의 세계> 1부는 변방의 언어로 머물던 ‘장애’가 아니라, 보통의 아이 정원이가 가진 자폐를 이야기합니다. 2부는 ‘서포트 리포토 for 정원이’로 직접 활용했던 리포트를 통한 구체적인 사례를 기록합니다. 이어서 행정학자인 엄마의 시선으로 정책의 틈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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