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감정을 선사해 주는
인간은 불가피하게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다른 존재에게 필연적이라는 말로도 해석된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이 살아남도록 자연선택과 진화가 되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함께 어울려 사는 삶 속에서, 사람들의 기분과 감정, 태도를 생각하다가 이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오늘,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라는 말을 가지고 글을 써 보려고 한다.
저 말을 예전에는 그저 수긍했는데, 지금은 약간 의문이 드는 문장이다. 기분과 태도가 유사하게 사람이 행동한다면, 기분을 바꾸는 것이 쉬울까, 태도를 바꾸는 것이 쉬울까?
나는 전자가 오히려 더 쉽다고 본다. 갓난아기를 예시로 들어보자. 아기는 먹을 거 하나에도 쉽게 행복해한다. 배가 부르면 웃고 기저귀가 불편하면 울어젖힌다. 딸기 하나를 줘도 웃고, 딸기를 뺏으면 운다. 그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다. 그저 울고 웃는 게 다인 아이들이다.
성장하며 그들은 화도 내고, 고맙다는 인사도 하는 어린이로 자라난다. 딸기를 뺏으면 뺏어가는 손을 치는 아이도 있고, 정중하게 내 딸기 돌려달라는 아이도, 여전히 울어 젖히는 아이도 있을 것이다. 이를 ‘태도’가 생겼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 태도가 훈육 몇 번으로 고쳐질까?
우선 내 답은 ‘아니’다. 몇몇 아이들에게서는 기분이 태도가 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아이들을 다시 웃겨 보면 어떨까? 졸리다고 찡얼거리는 아이를 푹 재우고, 배고프다고 우는 아이를 배불리 먹이고, 기저귀가 불편한 것을 갈아준다면, 그들은 금세 우리에게 다시 웃음을 날릴 것이다.
아이들이 우는 것이 주변인들의 입장에선 때론 곤욕스럽지만 그들의 미소는 정말 천사와도 같아서 무장해제가 되어버린다. 여기서 그들은 의사소통에 미숙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육아 칼럼을 쓰는 것이 아니니 각설하고, 기분이 태도가 된다면, 기분을 좋게 만들면 좋은 태도가 나올 것이다.
아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독자인 성인들 같은 경우, 자신의 감정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화가 났거나, 행복하거나, 속상하거나, 등등. 그런 감정을 찾고 아기들처럼 원인만 해결해 준다면, 감정은 다시 기분이 될 것이고, 그 기분은 태도로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actitud라 일컫는-주위 나의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이 세상 사람들 중, 누가 부정적이고 싶겠는가. 가능하면 긍정적이고 싶고,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 아니겠는가.
나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면, 기분을 좋게 바꾸는 일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인 것 같다. 따뜻한 차 한 잔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나처럼, 기분이 태도가 되게 만들면 오히려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왜 저런 말이 생겼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어야 한다. 기분은 (딸기 하나로도) 아주 자주 바뀌기 때문에 태도를 자주 바꿔서는 안 된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딸기 하나로는 기분을 바꿀 수 없게 만들면 되는 훈련을 하면 되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왈가닥이 아니라, 차분한 사람. 감정 기복이 크지 않은 무던한 사람이 된다면 기분이 태도가 되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리고 조울증이나 다른 질환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렇게 감정이 확확 바뀌지도 않을뿐더러 단계가 있을 것이니 너무 걱정 않도록 하자.
나는 나의 좋은 기분을 태도로 만들고 싶다.
그리고 나의 좋은 태도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해 주고 싶다. 민들레 씨앗을 불고 나서 미소를 짓거나 깔깔거리며 웃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