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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13. 2019

여자는 남자의 '걱정'을 '사랑'으로 느끼지 못했다

심야(深夜)의 식탁, 결혼 7년차 남녀의 대화

심야의 식탁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거잖아요~



심야의 식탁에는 자녀들을 재우는데 성공한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남자는 약간 억울하다는 듯, 다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하소연하듯이 말하고 있었다.

그랬다. 남자여자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녀가 상처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나 컸다.



남자가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


남자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순백(純白)의 사람이었다. 때가 묻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이 세상에 발 붙이고 있었지만, 마치 그에 속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줄 정도로 그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여자를 지켜주어야겠다고. 누구나 더러워진 눈보다는 새하얀 눈을 더 즈려 밟고 싶듯이, 저런 순백의 사람을 세상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나는 비록 닳고 닳은 사람이지만 순백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니까. 뭇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남자여자의 순수함을 지켜내리라 다짐했다. 그것이 그녀에 대한 첫 마음이었다. 



남자의 반전(反轉)


남자여자를 처음 만났던 그 때를 기억해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를 지켜내리라는 마음이 달라져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지켜내기 위해서 그동안 해 온 노력들의 방향이 어긋나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내가 보기에 마치 '미운 오리 새끼' 같았어요. 내가 '백조'였다면 좋았겠지만 나 역시 '오리'였고, '오리'들이 모인 무리 속에 살아가고 있고, 살아가야 하니까, '오리'들 속에 상처 받을 당신이 걱정이 되니까. 그래서 당신이 '오리'는 아니지만 '오리'처럼 살아가길 바랬던 거죠."


당신은... 내가 보기에 마치 '미운 오리 새끼' 같았어요


여자는 물을 한 모금 머금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여보가 나를 진실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는 건 이제서야 알겠어요. 하지만 그동안은 그렇게 느끼지 못했어요."


남자는 그녀를 사랑하고 지켜내고자 했던 에너지가 컸던만큼 마음이 아팠다. 그 커다란 에너지를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쏟아왔었기에. 사랑하는만큼 그녀를 아프게 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미안해..." 



'있는 그대로' 사랑 받을 때가 제일 좋아요


여자는 어두운 동굴에서 빛을 발견한 사람의 눈빛을 하며 남자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오리'로 만드려고 할 때마다 당신이 나의 모습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하지만 이제는 알겠어요. 당신이 나를 '백조'로 여기고 사랑하고 있다는 걸. 그 아름다움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는 걸. 

그렇지만 여보, 나는 '있는 그대로' 살아갈 때가 행복해요. 그리고 '있는 그대로' 사랑 받을 때가 제일 좋아요. 이제는 다시 본연의 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노력해줄래요?"


남자는 마음 속이 아득해져왔다. 십여년 전, 순백(純白)의 그녀를 지켜내리라 다짐했던 그가 가장 앞장서서 새하얀 그녀에게 이런 저런 '때'를 묻혀왔던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가 세상에 상처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녀를 세상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때가 적당히 묻은 사람'으로 바꾸고자 노력했던가. 그래야 유별난 사람이 되지 않으니까.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에게 관대하고, 튀는 사람에게 엄격하니까. 

남자의 마음 속에 떠올랐던 '사랑'의 이름을 달고 있는 변명들은 하나 둘 씩 헬륨이 들어있는 풍선처럼 두둥실 하늘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녀와 아이들을 존재하는 그대로 사랑하리라.'

'걱정이 된다면 그저 걱정이 된다고 말해주리라.'



'백조'와 같이 온화한 날갯짓을 할 수 있다면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남자의 눈시울이 조금 붉어지고 있었다. 아직 때묻지 않은 아이들이 상대해나가야 할 세상의 무게가 느껴졌다. 하지만 차원이 다른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무게를 전가할 필요는 없었다. 어디에 발 붙이고 살고 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늪과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살면서도 백조와 같이 온화한 날갯짓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 아니겠는가.

늪과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살면서도 백조와 같이 온화한 날갯짓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 아니겠는가.


식탁에 앉은 두 남녀는 그렇게 어긋날 뻔 했던, 속도를 낼 수록 탈선할 수 밖에 없던 기찻길을 다시 조율하는데 성공했다. 남자는 사랑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향이 훨씬 더 중요함을 실감하며 여자를 살며시 토닥였다.


창 밖으로 어슴프레 동이 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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