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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Jan 10. 2024

돼지 목에 목도리

지인에게 선물을 받았다.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고. 혹시 바꾸고 싶으면 백화점 매장에서 바꿔도 된다고 말하며 선물 상자를 건넸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선물은 취향을 떠나 언제나 기분 좋은 물건이다. 주는 이의 손끝을 타고 들어오는 마음이 감사하기 때문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종이가방에서 상자를 꺼내 곱게 묶여있던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순간,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갈색과 쑥색이 어정쩡하게 섞인 목도리였다.  내 얼굴색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말을 고쳐서 다시 해야겠다. 선물만큼 취향에 부합하기 어려운 물건이 없다. 거울 앞에 서서 어깨에 걸쳐 보았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냐고 노래한 이승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족에게 보여주었다. 다들 고개를 저으며 나와 의견을 같이했다. 고민 끝에 나중에 백화점에 가서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목도리를 곱게 접어 다시 종이 상자에 넣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살바도르 달리의 녹아버린 시계 그림처럼 종일 늘어진 몸으로 지내는 일요일이 되었다. 어느새 해는 저물고 어둑해진 밤의 기운이 찾아올 때쯤 문득 잊고 있던 목도리가 떠올랐다. 오늘이 아니면 나의 게으름으로 목도리는 영영 옷장에서 살 것이다. 식구들에게 백화점에 가서 목도리도 바꾸고 외식하고 들어오자고 말했다. 외식이란 말에 칠순이 넘으신 엄마와 이제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딸, 남편까지 군말 없이 일어났다.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벽에 붙여진 층별 안내를 재빨리 훑고는 목도리 브랜드 매장을 찾아 해당 층에 내렸다. 이 동네에 이사 온 지가 2017년이니 6년이 훌쩍 넘어 곧 7년이 된다. 꽤 오래되었는데 이 백화점에 온 기억이 없다. 아니 백화점 매장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내겐 낯선 경험이 된 지 오래다.


그래서일까. 명품으로 장식된 백화점 특유의 화려한 분위기와 화장품 냄새 가득한 공간이 참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치 흰 바둑알 통에 잘못 들어간 검은 바둑알처럼 이곳에서 나를 끄집어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먹잇감을 찾는 매의 눈으로 목도리 매장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사이 남편이 먼저 그 브랜드 매장을 발견했다.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다른 매장들을 지나치며 걸었다.


매장에 도착하자마자 목도리를 바꾸러 왔다고 말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자 점원이 상냥한 어조로 둘러보라고 했다. 점원의 안내에 따라 내가 받은 목도리가 포함되어 있는 가판대부터 살폈다. 그 브랜드 특유의 무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에 무늬가 없는 단색의 목도리 서너 개를 골라 어깨에 걸쳐 보았다.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점원에게 돈을 좀 더 낼 수도 있으니 다른 종류도 보여달라고 했다.


몇 개의 목도리를 걸치고 매장 거울 앞에 서서 확인하고 가족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 반복이 열 번이 넘어가자, 가족과 매장 직원 모두의 얼굴에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가지런히 정렬된 가판대 위에 내가 걸쳤다가 내려놓은 목도리들이 널브러진 채 계속 쌓였다. 딸은 이제 내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목과 겨드랑이에서 진땀이 났다.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결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마침내 걸쳤던 목도리 중에 가장 나아 보이는 하나를 다시 집어서 들어 올렸다. 어느 옷에 걸쳐도 무난한 아이보리색 목도리였다. 점원에게 이걸로 하겠다고 말했다.


“고객님, 이건 받으신 목도리보다 금액이 좀 올라갑니다. 받으신 물건은 14만 원이었고요. 이건 35만 원이에요. 지금 세일 기간이라…. 탁탁탁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18만 원 더 계산해 주시면 됩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35만 원이라니! 이 얇디얇은 목도리가 내가 입고 있는 옷값보다도 비싸다고? 울상이 된 얼굴로 남편을 돌아보았다. 남편은 무심한 듯 가격보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것으로 고르라고 훈수를 두었다. 받아들이기 힘든 금액에 그지없이 가슴이 두근거려 다른 목도리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옆 매장을 구경하던 엄마가 저쪽에서 아직 멀었냐고 물었다. 딸은 언제 저녁을 먹으러 가냐고 투덜댔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크게 심호흡했다. 구경하던 목도리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계산대로 가서 아까 사겠다고 했던 목도리로 고르겠다고 침통하게 말했다. 점원은 금세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 세일 기간에 정말 좋은 물건을 잘 골랐다고 했다. 드르륵하고 18만 원이라 적힌 카드명세서 나오는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지만, 그 소리는 기차가 선로를 밟고 가듯 내 가슴을 긁고 지나갔다.  


차에 올라 식당으로 가는 길, 내 머릿속에는 번개 같은 자기 합리화 과정이 일어났다.

‘그래. 이런 좋은 아이템 하나 정도 있으면 옷도 맵시가 살아날 거야.’

‘돈 벌면서 나한테 이런 선물 하나 정도는 줄 수도 있잖아?’

‘곱게 쓰면 딸에게 물려줄 수도 있지 않겠어?’

‘10년 넘게 겨울마다 두르면 해마다 3만 원 이하로 쓰는 거잖아?’


그건 정말 옹색한 변명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지만, 마음을 편하게 하는 단기 처방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후 며칠간 발생했다. 마음이 가난해진 탓에 내가 입은 손실을 만회하려는 심리적 보상행위가 뒤따랐다. 평소라면 가볍게 샀던 음료수 한 병 앞에서 머뭇거리고 다시 내려놓는가 하면, 마트에 시장을 볼 때도 가격이 비싼 고기보다 저렴한 두부에 손이 갔다.


앞으로 며칠이나 더 이런 상태로 지낼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후회와 반성하는 마음도 흐려질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교훈은 얻었다. 나와 비싼 목도리는 결이 맞지 않는다고. 이번에는 미래의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 가치 있는 경험을 했다고 생각해야겠다. 아울러 충동구매로 인한 죄책감도 다시는 만들지 않으리라.

     

한 줄 요약 : 그나저나 이번 주 금요일 저녁 모임에는 반드시 그 목도리를 두르고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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