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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ree Baik 애리백 Dec 15. 2019

제3화 숨겨 놓은 편지를 열어봐

구체적이고 단단한 인간, 줄리엔

줄리엔이 내게 보내온 이메일은 <no subject>, <제목 없음>이라는 제목으로 도착했다. 옆에서 누군가 내 이메일함을 흘낏 쳐다본다 해도 무슨 내용일지 곧장 짐작이 가지 않을, 내용을 속 안에 숨겨놓은 편지였다. 나는 조용히 내 사무실 문을 다시 한 차례 여닫고 컴퓨터 앞으로 되돌아와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잡았다. 편지를 클릭했다. 조금 전 내게 ‘직장 내 괴롭힘’에 관한 공문을 건네주고 간 줄리엔이었다. 이메일은 Dear Aeree로 시작되었다.
 

애리에게,

루이스 클락은 우리 회사 안에서 발생하는 관계 관련 갈등 상황을 중재하는 프로그램을 맡고 있는 사람이야. 같은 동료이면서 이 같은 회사의 공식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평상시 우리가 맞닥뜨리는 일들을 잘 이해하고 있어. 그녀는 스코틀랜드 사람이야. 매우 사려 깊고 비밀유지가 보장된 인물이야. 아마도 나보다는 그가 너에게 필요한 구체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 다음 단계로 밟아야 할 결정은 뭐가 될지. 지금껏 수많은 사례들을 다뤄왔을 테니까. 네가 염려하는 리스크나 계약 연장 관련한 걱정들에 대해서도 말이야.

혹시라도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하다면 언제든 내 사무실을 향해 소리 질러. 너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 필요할 때 내 사무실 문을 꼭 닫아놓고 여기서 얘기하면 돼.

우리 힘내자,
줄리엔


나는 그 이메일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메시지인 것처럼 읽고 또 읽고, 전체 복사를 해서 다시 워드 파일에 붙여 넣기 한 다음 문서로 저장해놓고, 회사 이메일이 아닌 개인 이메일에도 다시 포워딩을 해 놓았다. 그렇게 줄리엔의 이메일을 세 차례 이상 읽고, 복사하고 붙이기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깜깜한 절망 속에 머물러 있던 기운이 조금씩 달라졌다. ‘이제 곧 살았구나.’하는 안심을 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문구들과 매우 실직적인 조언에 마치 동아줄을 내려받은 것처럼. 그때 나는 싸움의 명분이 생겼고, 도와줄 동료가 생겼고, 어쩌면 내가 속으로만 앓고 있던 문제를 꽤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시작했다. 우군이 생겼다는 것은 이런 느낌일까.

그 전날의 일들이 떠올랐다. 생각지도 않게 줄리엔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내 말을 듣던 그가 별안간 매우 못마땅한 말투와 표정으로 발언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약간 당황했던 것이 사실이다. “줄리엔, 그거 알아요? 우리 국이 전체 미팅을 할 때 줄리엔의 이름이 자주 등장해요. 유능한 인물이니 당연하죠. 줄리엔은 자신의 업무 이외 팀원들의 일을 보이지 않게 많이 도와주고 있다고요.”
 
영어 모국어자인 줄리엔은 팀원들 하나하나가 생산해내는 보고서들을 검수하는 영문 에디터이고, 관리자들이 운영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의 재정 출납을 프로젝트 매니저가 아닌 줄리엔이 대신 도맡아 하고 있었다. 물론 비공식적인 일이다.

“우리 보스는 자주 줄리엔 같은 훌륭한 멀티 플레이어가 있다면서 멀리 있지 않으니 물어보고 좀 배우라고, 당신을 모델 삼으라는 얘기를 벌써 몇 차례나 했어요. 그렇게 소극적으로만 일하지 말라고요. 사람들이 가끔 방어적으로 나올 때가 있잖아요, 갑자기 다른 사람의 일을 떠맡을 때라든지.. 내 분야의 일이 아니니까 터치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할 때.”

나는 그의 보이지 않는 공로가 우리들 사이에서 얼마나 칭송받고 있는지 말한 것뿐이었다. 오히려 그가 대번에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대꾸할 때 당황한 사람은 나였다.


“다음 회의 때 또 내 얘기가 나온다면 너의 국장한테 말해. 그거 줄리엔이 원하지 않는 방식의 언설이라고 말이야.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다른 팀 동료들과 비교해가면서 자기 팀원들 스트레스 주는 데에 내 이름이 거론되는 건 동의할 수 없어.
나는 여유도 있고 여력이 되니까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돕는 것뿐이고 이건 표준이 아니야. 애리 네가 하는 일과 내가 하는 일이 엄연히 성격이 다른데 그렇게 단순 비교당하는 건 적절하지 않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 팀 관리자들은 나를 압박하지도 않고 타인과 비교하지도 않아. 내 말을 다들 존중해 주니 지금껏 가능한한 협업이 되었어. 뭐, 당연히 상황이 다르지. 내가 종신 계약을 취득한 지 오래되었고 우리 팀에서 가장 나이가 많기 때문에 그런 지도 모르지. 마감일이 임박했을 때 일을 내게 넘겨주면 나도 거절한다고. 아무거나 다 받아주는 건 아니야. 엉뚱한 사람 닦달하지 말고 아예 마감일을 늦추라고 요청하는데 무슨 소리야.”

그 당시 나는 너무 많은 일들을 동시에 감당하고 있었고, 괴로웠고, 매일같이 야근을 했다. 야근 후에는 하루 종일 긴장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집에 돌아와 혼자 와인을 마셨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석 잔이 되었다. 세 명의 관리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나는 점점 고립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주간은 셋 중 한 명의 보스가 5일 내내 내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그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나는 스스로 능력 부족을 탓하며 더 잘 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연말 평가가 걱정이 되었다. ‘다음 계약 연장은 또 어떡하지?’ 줄리엔의 대답을 들으며 이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필요한 시간과 자원을 관리하는 건 ‘관리자’의 몫이 아니던가. 왜 나는 그걸 떠안았니? 세 명의 보스에게는 관리자가 있다. 머리가 아파왔다.  

줄리엔은 행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내가 처한 상황을 차분한 마음으로 풀어놨을 때에 그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인사과에 있는 동료에게 연락을 취했다. “인사과에서는 무슨 형태든 도움을 줄만한 사람을 찾아 줄 거야. 네가 혹시 익명으로 보고하고 싶다면 내가 대신 너의 고충을 전달해주겠어.”


곧바로 전화가 연결이 되지 않자 수화기를 내려놓고서 내게 말했다. 단호한 표정이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너희 매니저는 너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면 안 돼, 너는 그런 취급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야.”
아.. 오래전 어느 날 상심하고 있던 줄리엔에게 그를 아끼는 보스가 해 준 소중한 한 마디였다.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며 줄리엔의 이야기를 청해 듣는 동안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힘든 시절을 겪던 줄리엔이 동료와 친구들에게서 들은 말들, 그 음성이 착한 메아리가 되어 먼 훗날의 내게 도착했구나. 이후 나는 회사 내 갈등 중재자인 루이스를 찾아갈 용기를 얻었다.

줄리엔과 오늘의 인터뷰를 확정하기 전 나는 그때 그가 내게 보내온 이메일을 다시 꺼내보았다. <제목 없음>이라는 편지는 너무 많은 응원과 헌사를 내포하고 있었다. “너는 이미 잘하고 있어. 내가 그걸 알아. 우리 같이 고민하자.”
인사과와 연금팀을 두루 거친 그가 내게 전달해준 동아줄은 그야말로 파워풀했다. ‘우리는 너를 지켜보고 있고 망가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는 인사과의 구체적이고 강력한 메시지를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청하던 날 나는 이 모든 스토리를 그에게 풀어놓았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이야기였다. 요소요소마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무사히 터널을 빠져나왔노라고. 그 시절을 시작 지점으로 삼아 단단해지는 연습을 시작했노라고. 그렇기에 줄리엔을 꼭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서사를 기필코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나의 인터뷰이가 되어 달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잠시 말을 멈추어야 했다. 앞에 놓인 티슈를 집어 부채질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나를 또렷하게 응시하며 천천히 덤덤하게 말했다.
“그랬었던가? 내가 네게 도움이 된 줄 전혀 몰랐어. 상기시켜줘서 고마워. 기분 좋고 감사해.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보통은 나도 잘 울거든. 내 앞에 앉아 있는 누군가 눈물을 쏟으면 나도 저절로 따라 우는데. 아마도 지금 먹고 있는 우울증 약이 효과가 좋은가 봐.”

이혼을 결정한 뒤, 법적으로 피 터지게 싸우고, 너무 많은 논쟁과 눈물과 무너짐을 겪으면서 줄리엔은 밑바닥까지 내려갈 만큼 감정 소모를 겪다 못해 허무를 경험했다. 몇 년 간을 법적으로 싸웠고 끝내 이혼이 성사되자, 이상하게 공허함이 찾아왔다. 더 이상 싸울 일이 없다는 것, 주력할 일이 없다는 것,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우스꽝스럽게도 자신의 쓸모가 아예 없어졌다고 여겨졌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어떤 상실을 겪었을 때 우리는 애도의 시간이 필요하잖아.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으로 어떤 이에게는 허무로.”

어려웠던 이혼 과정을 지켜보며 심정적으로 큰 지지를 해주었던 줄리엔의 언니는 그를 이해한다고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사람은 늘 행복할 수 없고 가끔 슬프고, 우울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고. 그렇지 않은가. 때로는 우리에게 햇볕이 필요하다. 그동안 비를 많이 맞았으니.

모든 사람들에게는 우울감이 존재한다고 말해주며 줄리엔을 안심시키는 언니 덕분에 그는 위안을 얻었다. 어느 날은 세상이 어둡고 어느 날은 밝기도 하다. 친구들과 외출을 하고 햇빛을 받으면 조금 전환이 된다. 모두가 갖는 ‘감정’이라는 거니까. 늘 밝을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상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만일 하염없이 울고 싶고, 자주 그렇게 울게 되는 자신을 보면, 그건 ‘마음’이 외부의 도움을 청하고 있는 거라고 언니는 설명했다. 줄리엔과 언니가 나눈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때의 기억으로 회귀했다. 사무실에서 도저히 집중이 안 되고 불안감에 휩싸여 어느 순간 눈물을 쏟고 있던 나 자신을. 그게 아마 우울증이었나? 반문하니 줄리엔은 담담하게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자신은 이유 없이 감정이 푹 꺼지고 울음이 나오는 상태가 한두 달이 지속되니 의사의 처방이 필요했노라고,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간에 부끄럽게 생각하는 게 우스운 일이라고.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이유가 있는 거고, 창피한 일이 결코 아니고, 매일 거울을 바라보며 얼굴을 확인하듯 동일한 방식으로 마음을 열어보고 열심히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줄리엔에게 물었다. 생각을 가볍게 전환시키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을까. 그는 언니와 함께 약속한 한 가지의 실험을 내게 말해주었다. 길을 걷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여주는 것이다. 내 기분이 어떻든, 마음이 소금밭이든 상관없이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면 3명 중 1명은 똑같이 미소를 지어 화답한다. 이 실험이 반복되면 더 많은 사람이 진심이든 그저 화답의 의미든 서로를 향해 웃어주고 좋은 에너지가 퍼져나가서 자신도 내면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말이었다. ‘미소를 지어주기’, 나는 펜으로 노트에 눌러 적었다. 나도 그 실험에 동참하고 싶다.

또 하나는 그의 심리상담가가 조언한 방법이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걷기, 화가 날 땐 아주 빠른 속도로 걷기. 두통이 서서히 나아진다, 분노가 공중으로 날아간다, 운동이 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기분에 뿌듯한 마음이 들기까지 하다. 나는 다시 펜을 들어 얼른 노트에 썼다. ‘빨리 걷기’.

내면의 힘을 회복하는 일은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했지만 자신의 고귀한 가치를 돌려받은 가장 중요한 숙제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조만간 시간을 내서 가까운 공원을 걷기로 했다. 한참 겨울날의 차가운 온도가 방해할지도 모르지만 곧 봄은 오고 있다고, 그러면 한결 쉬워진다고 서로를 설득하며 행복한 결론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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