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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나 Sep 26. 2021

15/엄마의 신앙 유품

로사리아의 선물, 엄마의 성가 책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엄마의 물건은 나에게 귀한 유품(遺品)이 되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다 남기고 떠나는 것 안에는 영적 유산과 물적 유품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같은 신앙 안에 엄마와 함께 미사 드리고 성전에서 보낸 시간은, 같은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실천으로 옮기려 노력한 모습은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유산 같다.


엄마의 묵주, 기도문, 다양한 상본과 성물이 유품으로 남았지만, 그 중 엄마가 늘 챙겨 다니던 성당 가방 속의 오래된 가톨릭 성가 책은 나에게 귀한 신앙의 유품이 되었다.


엄마의 성가 책에는 앞, 뒤에 볼펜으로 적은 다양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분명 엄마의 마음에 남아있는 문장이었기에 그렇게 적어두신 거겠지. 종종 미사를 함께 갔을 때, 엄마는 신부님 강론 속 좋았던 말씀을 적어두거나, 수녀님과 기도하시는 시간에, 그날의 기억을 일단 글씨체가 정갈하지 않아도, 일단 잊기 전 적어두던 엄마 모습이 그려지기에, 나에게 이 성가 책은 그 문장 덕분에, 엄마가 책 사이에 적어둔 세례명으로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물건이 되었다.


언젠가 다양한 곳에 메모하는 엄마에게 "엄마가 그렇게 적어두는 노트가, 한 권에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되어있으면, 그게 딸인 나에게 정말 큰 보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었지만, 엄마는 새로운 노트보다는 늘 챙겨 다니시던 성가 책 앞과 뒤편에 쪽지 쓰듯 남겨둔 문장이 많았다. 지갑 안에도 따로 볼펜 고리를 만들어두었던 엄마였다.


엄마의 성가 책은 오래되어 뒷면이 테이프로 덧대어 있었고, 부분 부분의 종이는 좀 찢어져있기도 했다. 그래도, 엄마가 오랜 시간 보아온 이 성가 책이 나의 신앙생활, 엄마가 남겨준 유산이자 보물이라 생각하니 어떻게든 그 책을 고쳐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망가진 책, 오래된 책을 수선하는 곳을 발견했다.


책 수선가의 다양한 작업물을 온라인으로 보면서 몇몇 책의 재탄생을 보고 놀랐었는데, 어쩌면 엄마의 성가 책만큼 나에게 귀한 책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책 수선가 분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다양한 책을 수선하고 재탄생시키는 분이기에 일정을 잡아 기다리고 성가 책을 어떤 형태로 다시 만들어볼지 의논했다. 엄마가 가지고 계시던 성모님 상본을 앞에 붙이고, 내부 가름끈은 검은색과 짙은 짙은 파란색으로 엄마의 컬러로 골랐다. 책의 안쪽에는 자세히 보아야 보이도록, 엄마의 세례명인 (로사리아, Rosaria)의 'R'과 나의 세례명인 (요안나, Joanna)의 'J'를 넣어 마주 보게 만들었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 내 남은 인생에 평생 이 성가 책을 가지고 다니며 엄마와의 시간을 기억하게 되지 않을까.


이번 추석에는 이 성가 책과 함께 엄마 모신 곳에 다녀왔다. 다섯 살짜리 조카가 이 성가 책을 쥐고, "하나, 둘, 셋 하면 노래 시작하는 거야."라고 말할 때, 한 권의 책이 엄마, 나, 조카로 이어진 그 시간도 돌아보게 되었다.


성가   엄마의 메모 덕분에, 엄마의 마음에 남았던 문장을 시간이 흘러  읽을  있게 되었다.  성가 책은 엄마의 시간과  시간,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엄마의 물건에 나의 생각과 책 수선가의 도움, 작업으로 재탄생된 로사리아의 선물!


‘더 깊이 사랑하고, 멈추지 말고 사랑하십시오.

사랑에 '이제 그만은 없다.' ,


내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기 때문에 인생에 나침판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나침판.

-2014.5.19 보좌신부님 말씀


어제 다르고, 내일 다른 날을 보내자. 젊게 살자.

사랑하는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어라. 내가 원하는 것 말고.


제 뜻이 아닌 예수님 뜻대로 하십시오

-보좌 수녀님 환영인사에서


감사한 마음은 바위에 새기고

서운한 마음은 모래에 써라

-2011.8.28 차 토마스 신부님 환송 미사


엄마의 성가 책 속, 급하게 쓴 글씨의 이 글이 2021년 가을, 나에게 다가와 또 다른 말을 건넨다.


신앙 안에서 나는 어떤 문장이 마음에 남아 있는지 돌아본다. 그때의 엄마 마음에도 잠시 머물러 본다.


———

이지나 요안나 @lifeisjina


쓰거나 쓰게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다양한 인연과 깊은 체험을 이 연재에 담아보려고 합니다. 작은 서점 <콜링 북스> 를 운영합니다.


신설화 @shinseolhwa


좋아하는 것을 그리고 만듭니다.

평화의 상점 사라와 카드 숍 P.S. draw and make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요안나의홀리저널 은 매달 2/4주 주일 아침에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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