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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험설계사 홍창섭 Jun 24. 2020

Part 1 이직을 결심하다

챔피언이 아니어도 괜찮아

                                                                                                                                  

사실상 첫 직장이었던 오* * 엘리베이터에서의 생활은 정말 바쁨의 연속이었다. 사법 고시 준비하느라 늦은 나이에, 정말 어렵게 들어온 회사였고, 그래서 그만큼 더 열심히 하려는 욕심도 있었고, 하는 대로 성과가 나오니 재밌기고 했고, 외국계 기업 특성상, 능력이나, 업무의 역할에 맞는 권한과 대우를 해주었기에, 바쁘기는 했지만 굉장히 만족스러운 회사생활을 하고 있었다.  




 입사 이래 정말 짧은 시기인 2년 만에 거의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실적 개선의 공로를 인정받아 혼자 사업부 포상을 받았고,  대구에서 시작한 관할 지역도, 점점 늘어나, 부산, 경남까지 관할하게 되면서 대리도 달지 않은 평사원 신분으로 10년 차, 15년 차 대리님 과장님을 포함한 각 지방의 채권 담당자를 총괄하는 팀장의 역할을 수행했다.


내 업무를 지원해주는 전속 계약직원도 뽑을 수 있었고, 운 좋게도 성과가 잘나서 동기들보다 더 많은 성과급을 받기도 하고, 회사에서 보내주는 대학원도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이 1년 2년 지나면서, 누구 시키기보다는 그냥 내가 하는 게 더 편한 성격 탓에, 그냥 내가 하겠다고 하나씩 일을 맡다 보니, 나 혼자 바쁜 나날이 계속되고, 도무지 일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승승장구할수록 일은 점점 더 늘어났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아졌다.




그러던 중, 조직이 개편되면서, 대구 지사에서 근무함에도 불구하고, 서울 본사로 발령이 나서, 빠른 시일 안에 대구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출근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우리 부모님과 누나 등 본가 가족들은 다 경기도, 서울 쪽에 살고 있었고, 폐쇄적인 대구 정서가 맞지 않아 나는 항상 서울에서 근무하기를 원하기도 했었지만, 막상 서울 근무로 발령이 나니 현실적인 문제 앞에 결정이 쉽지가 않았다. 물론 나에게는 대구지사에서, 아무런 능력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반복되는 잡다한 일을 하기보다는, 서울 본사에만 오면 내가 원하는 어떤 부서라도 보내주겠다는 당시 부서장님 말대로라면, 외국계 기업의 꽃이라는 재무나 회계 업무를 경험하거나, 본래 가장 하고 싶어 했던 인사, 노무 일을 하면서, 서울 명문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치는 게 내 커리어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이상이었고 현실은 달랐다. 20살 고등학교 졸업 후 수원 서울 대구 등 전국을 다니며, 혼자 살아왔던 나와 달리, 와이프는 대구를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는, 100% 대구 사람이었고, 그런 와이프를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서울에서,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데리고, 나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게 한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금전적인 문제도 컸다. 늦게 사회생활을 한지라, 모아둔 돈도 하나도 없는데,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집을 구하고, 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도 2시간씩 걸려 출퇴근하고, 다시 영어 공부를 하고, 새로운 일을 또 배우고, 치열하게 서울 명문대 아이들과 경쟁을 하는 삶으로 들어가기가 자신이 없었다. 와이프랑 아이들은 그들대로 고생이고 나도 나대로 훨씬 더 고생을 해야 했다. 지금보다 더 힘들 것이 명확했다.




  아무도 행복하지 않을 그 힘든 고생을 할 거면 , 어차피 결국 다시 이직을 해야 할 거면 차라리 지금 다른 회사를 알아보는 게 나을듯했고, 이왕이면 대구에서 다닐 수 있는 회사를 찾기 위해, 이후 매일 취업사이트를 뒤지고, 헤드헌터들을 만나고, 기회가 닿는 대로 경력직 이직 면접도 다녔다. 그런데, 정말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이왕 이직을 할 거면, 지금의 회사보다는 훨씬 더 나은 보수를 받거나, 아니면, 뭔가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거나, 그래도 좀 더 인지도 있는 회사를 다니고도 싶었고, 이왕이면, 좀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오티스에서 좋은 커리어를 쌓았으니,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보다 좀 더 많은 보수를 주겠다는 곳은 역시나 서울이나 경기권이었고, 월급 조금 오르는 대신, 지금보다 일을 훨씬 더 많이 해야 할게 보였고, 대구에서는 지금 회사보다 더 좋은 회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내 맘대로 해도 다 인정해주고, 대우해주는 회사는 없었다.




샐러리맨으로서는 지금의 회사가 결국 최선이라는 결론이었고, 그럼 내가 원하는 능력에 맞는 높은 보수, 자유로운 시간, 사회적 가치와 보람 등을 얻을 수 있는 건 자영업자나, 보험, 제약, 자동차 영업인데 자금도 없고, 영업을 해본 적도 없고, 별다른 전문 자격증도 없던 나는 그런 직업을 선택할 수 자신은 없었기에, 결국 어쩔 수 없이 본사 발령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늦추면서, 서울생활을 할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내 동료들은 다들 나를 부러워했지만, 나는 정말 힘들었고, 혹시나 하면서 매일매일 퇴근만 하면 구인 사이트를 뒤지고, 입사 지원을 하고, 이력서를 업데이트를 했다. 매일 불만이 쌓여갔고, 제발 서울을 안 가도 되는, 그리고 내가 바라는 그런 곳이 있기를 바라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그러다 우연히 푸***이란 곳에서 올린 세일즈 매니저 채용 프로그램이 란 걸 보게 되었다.


보험회사이기는 하지만, 영업이 아니라 관리직으로 보이는 매니저 채용이라니 좀 관심이 더 갔고, 일단 채용 설명회가 있어서, 편한 마음으로 참석을 했다. 당시 뭐든 대안을 찾아야 했고 누구든 만나고 찾아다녔었다.




거시서 내가 그렇게 듣고 싶고 보고 싶고 하고 싶던 일들을 알려주었다. 편견 속에 있지만, 사실은 보험이란 게 정말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이라고, 내 능력에 따라, 거짓말하지 않고 사기 치지 않고도 원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고,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시간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했다. 저렇게 가치 있는 생명보험이라면, 어쩌면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보험회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나는 저렇게 좋은 조건의 좋은 일을 왜 사람들이 하지 않을까 의심도 들었지만, 대안이 없던 나는 부디 저런 회사가 존재하고, 저들이 한 말들이 진짜이기를 바라며 공식적인 회사 설명회를 다 듣고는 뭔가에 홀린 듯 쉽게 입사를 결정했다. 저 이야기를 정말 믿고 싶었다




 이후 담당 지점장님들이 찾아오셔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회사에 대한 이야기, 궁금하고 의심 나는 점에 대해서 답변을 듣고, 내 선택의 확신을 키울 수 있었다. 막상 가면 다를 수 있겠지만, 서울에서 적응하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기도 했고, 당시 지점장님이 말씀해주신 나처럼 착하고 고지식한 사람이 사실은 보험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사실 입사를 결정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11주 영업만 하고 나면, 설계사를 뽑고 관리하는 관리직인 세일즈 매니저를 할 수 있다는 거와 그 기간 동안 오티스 때보다 훨씬 높은 안정된 보수를 준다는 거였고, 그땐 세일즈 매니저가 얼마나 힘든 일인 줄 모르고, 그냥 사람 관리하는 거. 본래 지금도 하던 일이니까 그건 자신이 있었고, 나를 챙겨주시던 지점장님께 몇 번이나 난 절대 영업 못하니 단 한건도 안 해도 되는지 괜찮은지도 물어봤는데, 그분이 한건도 안 해도 된다고 하셨다. 물론 그분은 내가 진심으로 그걸 받아들일 줄 모르셨겠지만 난 정말 보험영업을 할 생각도, 자신도 없었기에, 단  한건도 안 해도 된다면, 입사하겠다고 했고, 어려운 최종 면접 끝에


푸***에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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