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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9. 2019

11. ‘불편함’ 받아들이기

by 한순범

「아침에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때 좋은 패턴을 찾기 위해 다양한 시도들을 해봅니다. 온전한 나만의 시간들을 가꾸어가는 노력들에 감사합니다.」


「관리자와 동료 교사의 가치가 상충되어 조율해야 할 때, 내가 가장 원하는 방법대로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충성스러운 부하직원도, 같이 맞장구치고 동조해주는 직장선배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 한쪽 편에 서기보다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독서모임에서 소개해주신 책들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읽을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립니다. 그리고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물들지 않는 방법 등을 공부했습니다. 제가 점점 더 나은 내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연결들에 감사합니다.」


「음주운전 처벌 강화법, 윤창호 법이 통과되었습니다. 원안보다 약화되긴 했지만 이것으로 인해 음주운전 사고가 심신 미약 따위로 감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많은 음주자가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법이 사회의 흐름을 조금씩 따라가는 것 같아 기쁩니다. 감사합니다.」


「먼저 출근한 남편이 가족 단톡에 '비가 옵니다. 우산 챙기세요.'하고 보냈습니다. '고마워요' 하고 따뜻하게 답 톡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해보자.’ 결심했던 것처럼 나의 아침을 기록하는 공책엔 위와 같은 감사 일기들이 늘어갔다. 전에는 잘 몰랐었던, 또는 당연하다 생각했던, 혹은 생각지도 못했었던 일들에서 감사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만큼 웃을 일도 많았고 감정의 여유와 넉넉함을 즐기게 되었다.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또한 그동안의 ‘나답다’라는 틀에서 벗어나자 했으니, 진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을 나의 틀로 평가하지 않으려 했으며, 내가 속한 세상의 이야기들에도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독서모임을 시작한 이후로 삶을 겉돌아 살지 않고 삶 속에 들어가 진하게 음미하며 살고 있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독서모임을 통해 줄곧 발전적인 성장만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넉 달 간의 독서모임이 끝났을 때 솔직히 함께 했던 모든 책들이 다 좋았던 건 아니다. 아니타 무르자니의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와 조 비테일과 휴 렌의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은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면서 편협하고 갇혀 있었던 ‘나답다’라는 틀을 자각했으니 성장했다 할 만하다. 하지만 고이케 히로시의 <2억 빚을 진 내게 우주님이 가르쳐준 운이 풀리는 말버릇>이라는 책은 너무 힘들게 읽었다. 결국 다 읽지도 못하고 책장을 덮고 말았다. 조금 유치하고, 대부분 말장난 같기도 하고, 너무 괴상했다. (그때의 나의 공부 정도에서는 그랬다.) 독서모임 날, 마침 안 나가도 될만한 적당한 사유가 생겨 처음으로 모임에 불참하였다. 이렇게 나는 불편한 책 읽기를 포기하였고 독서모임도 회피했다. 


  한 번은 자유 도서를 선정하여 읽고 독서모임을 했었는데 나를 깨우는 책이 어떤 것인지 잘 몰라서 작가님이 추천해주신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다. 여기에서 나는 내 주변에 나도 모르게 자꾸 흘러들어오는(적당한 표현을 모르겠다.) 책들이 서로 깊은 관련성을 맺고 있음을 알아채는 경험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 그즈음 대형서점에서 주최했던 작가 채사장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자신의 내면적인 성장과 독서에 대한 관심 영역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결국 다다른 곳이 자기 초월이었다는 요지의 강연이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성장의 과정이 채사장이 가고 있는 깨달음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는 아직 아주 미미하고 초급 단계에 있지만. 어쨌거나 그렇게 단계, 단계 성장하고 있는 채사장의 이야기가 궁금하여 <열한 계단>이라는 책을 샀다. 그렇게 <싯다르타>와 <열한 계단>을 병행하며 읽게 되었다. <싯다르타>의 모호한 문장들이 <열한 계단>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고, <열한 계단>에서 인용된 철학, 인문학, 종교적인 지식들이 <싯다르타>에서는 맥락이 있는 이야기로 제시되어 있었다. 이 두 책은 서로 연결되어 깊게 읽혔고 나의 자아실현에 커다란 전환점이 될 만한 생각의 변화를 가져다줬다. ‘깨달음은 어떻게 얻어지는가’에 대한 소설 속 <싯다르타>의 이야기와 <열한 계단>에 인용된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연결하여 나의 생활과 관련지어보니 ‘불편함을 받아들이자’라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


  소설 속 싯다르타는 인도 카스트제도의 바라문(브라만)이라는 최고 계급에서 안락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사문(바라문이 아닌 출가 수행자들)을 따라 고행을 한 뒤, 고타마(붓다)를 만나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의 가르침에 탄복하였지만 결국은 고타마를 떠나게 된다. 그 이유는 “당신은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을 얻으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은, 당신이 그것을 얻기 위하여 나아가던 도중에 당신 스스로의 구도 행위로부터, 생각을 통하여, 침잠을 통하여, 인식을 통하여, 깨달음을 통하여 얻어졌습니다. 그것이 가르침을 통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말입니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결국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가르침을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타마를 떠난 싯다르타는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인간의 희로애락을 겪게 되고 결국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이 과정이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제시했던 변증법과 연결된다. 처음 바라문으로 평화롭고 고요하게 지내던 정(正)의 단계, 자랄수록 이것이 맞는지 의심하기 시작하며 질문하게 되고 모순을 찾게 되는 반(反)의 단계, 그래서 바라문과는 다른 사상으로 대결하며 공존하고 있었던 사문으로의 합류(合). 다시 사문과 함께 고행을 하는 정(正)의 단계,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의문을 갖게 되는 반(反)의 단계 후 세존 고타마의 가르침에서 스스로 깨닫는 자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합(合), 다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인간의 희로애락 과정을 겪는 정(正)의 단계, 다시 모순된 자아를 발견하는 반(反), 뱃사공 바주데바와의 재회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합(合). 이러한 변증법적 정반합을 거치며 조금씩 성장하여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정반합의 과정에서 나는 정(正)의 길로만 가려고 했다. 내가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만 하려고 했다. 그러니 더 나아가지 못하고 벽에 가로막힌 듯한 답답함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깨달음에 대해 알려주는 책을 읽은들 무엇하랴? 나 자신이 스스로 겪고 부딪혀서 벽을 깨야 하는데. 그래서 나는 나에게 있어 반(反)이 될 수 있는 질문들을 찾아냈다. 불편한 것은 정말 나에게 해로운가? 그 불편함은 어떻게 만들어졌지? 진짜 불편한 것이 맞긴 할까? 전에 ‘나답다’라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그 껍질을 벗어낸 것처럼 이번엔 ‘불편함’을 겪어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독서를 통해 나를 깨우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실천해보자고 마음먹은 것이 있다. 


- ‘불편함’을 받아들이고 용기 있게 겪어내 보자.


  ‘불편함을 받아들이자.’ 해서 생명과 안전에 위협이 되거나 공익에 해로움을 주는 그런 불편함을 받아들이자는 건 아니다. 가령, 허용되지 않은 공간에서 담배를 피워서 담배 연기를 맡게 되는 경우,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작은 화재가 났을 때 불법주차 차량 때문에 소방차 진입이 늦어진 경우 등에는 철저한 시민 의식을 발휘해 항의했다. 여기에서의 불편함은 철저히 사적인 불편함이다. 내가 살면서 만들어낸 나만의 불편함.


  불편함을 받아들이는 실천들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행해졌다. 예를 들어 복숭아털 알레르기로 복숭아를 깎을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깎아볼 용기를 내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나는 복숭아털에 약간의 알레르기가 있다.(목숨이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고 털이 피부에 닿으면 소름이 돋고 간지럼증이 나는 정도) 그래서 복숭아는 누가 깎아주지 않으면 전혀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 옆에 털 있는 복숭아가 있다고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이니 안 깎은 복숭아는 손에 대 보지도 않았다. 며칠 전 남편이 복숭아 철이라며 복숭아 한 상자를 사 들고 왔다. 나 빼고 다른 가족들이 먹으면 되고, 깎아주면 한, 두 조각 먹으면 되겠지 했는데 웬걸, 남편이 복숭아만 사두고 장기출장을 갔다. 그 바람에 상자 안의 복숭아는 방치되어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급기야 썩어 가며 날파리들이 꼬이기 시작했다. 예전 같으면 그대로 싸서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해버렸을 것이다. 그날은 이걸 어쩌나....... 하염없이 바라보다 ‘아, 이건 내가 불편한 거지. 나의 건강과 생명에 위협이 되는 건 아니잖아. 한낱 과일일 뿐인 복숭아를 나에게 큰 불편함을 주는 개체로 만든 건 바로 나잖아. 불편함을 받아들이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비닐장갑을 끼고 복숭아들을 세척하고 칼로 깎아 과육들을 가지런히 담았다. 많이 힘들고 싫을 줄 알았는데 달콤한 복숭아의 향과 보들보들한 과육의 촉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더욱이 맛나게 먹어주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니 행복해지기까지 했다. 불편함을 이기지 못하고 복숭아들을 버렸다면, 복숭아를 사놓고 출장 가버린 남편을 무책임하다 탓했을 테고, 복숭아 하나 못 깎는다며 딸아이를 타박했을지도 모른다. 비싼 과일을 하릴없이 버려야 하는 아까움에 화가 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불편함을 받아들였기에 아까운 과일을 딸과 함께 맛나게 먹을 수 있었고,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를 어디서 사 왔냐고 고맙다고 남편에게 감사까지 했다.


  불편함을 받아들이면서 삶을 더 행복하게 살게 된 경험을 하나 더 얘기하자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게 된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주말에 남편과 딸아이가 약속으로 나가고, 하필 나만 약속이 없어서 집에 있게 되었을 때 혼자 남겨진 시간이 너무 불편했다. 그 시간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잠에 빠져들었다가 다시 텔레비전을 보고 그러면서 무기력하게 보냈다. 나의 가족들은 내가 이런 상태일 때를 가리켜 폐인모드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왜 나에게 주어진 이 혼자만의 시간을 폐인처럼 보낼까? 더 기억을 더듬어 보니,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교사로서의 재충전기, 방학이 왔을 때조차도 집에 혼자 있기 싫어서 학교에 나가 일을 찾아 하고 연수를 받으러 다니곤 했다. 그게 열심히 사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야 행복해질 줄 알았다. 돌이켜보니, 항상 나는 가족, 직장 동료, 친구들과 약속이나 해야 할 일 등의 일정을 만들었을 때 열심히 살았다. 타인이 나에게 제시한 과제를 해내고 그것을 인정받을 때에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았던 것이다. 혼자 있는 시간은 감옥에 갇힌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불편하고 불안했다. 이제 그 불편함을 받아들여보자 결심한 뒤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쓸까 고민했다. 우선 내가 잘하지 못하는 혼자 카페 가기, 혼자 영화 보기, 혼자 밥 먹기를 해보기로 했다. 혼자 있게 된 주말 아침, 차를 몰고 집 근처 헤이리에 있는 한 카페에 갔다. 카페의 3층에는 작은 영화관도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커피와 빵을 사서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영화관에는 다른 손님들도 있었지만 다행히 혼자 온 나를 이상하게 보지는 않는 것 같았다. 혼자 온 다른 손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자 마음이 더 편해졌다. 커피와 빵을 즐기며 영화에 빠져들었다.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혼자 이 모든 걸 해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도 않았다. 이 경험으로 인해 나는 혼자 놀기의 영역을 더 넓혀 나갔다. 혼자 공방에 찾아가서 감성 수채화를 배우게 되었고, 혼자 서점에 가서 책을 보고 아울렛에 가서 쇼핑도 했다. 마치 카페 순례처럼 새로 생긴 카페들을 찾아다니며 그곳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 할 일이 정말 많았다. 이건 내가 스스로 정한 일이었다. 여기에 타인은 없다. 나 자신만 존재했다. 이 시간들이 즐거웠다. 


 독서모임의 다섯 번째 책 <상처 받지 않는 영혼>을 공부하고서는 불편함을 넘어서 더 나아가 두려움을 느끼는 부분을 인식하고 받아들여 이겨내는 것까지 확장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 책은 나를 깨우고 성장시키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책이다. 나의 인생 책이라고 할 만큼 많은 영감을 주어 원서 <The Untethered Soul>도 구입해서 읽었다.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목차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여기에서는 이 책을 통해 내가 두려움에 대해 무엇을 배웠느냐를 말하고 싶다. 


  마이클 싱어의 자전적 이야기인 <상처 받지 않는 영혼>은 깊은 명상을 통한 내면세계의 관찰과 탐구로 우리의 내면에는 마치 룸메이트처럼 문제를 일으키는 마음의 지껄임과 객관적인 태도로 지켜보는 의식인 진짜 내가 함께 있다고 설명한다. 마음의 지껄임대로 산다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면의 룸메이트인 마음이 조정하는 것이므로 그 마음과 결별하라고 권한다. 즉 삶의 문제를 일으키는 건 마음속의 끊임없는 지껄임일 뿐, 지켜보는 진짜 나의 관점에서 보면 중대한 일 앞에서도 중심을 지키며 평화와 사랑과 자비 속에 삶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나의 자동차 운전에 대한 두려움에 대입해보자면, 나의 마음은 ‘그래도 가까운 곳을 천천히 운전하는 것은 할만해. 하지만 먼 곳을 운전하는 건 두려워. 다른 지역에서 하는 좋은 연수도, 내가 가야 하는 장거리 출장도, 내가 사는 지역을 넘어선 여행도 누가 태워다 주지 않으면 할 수 없어. 그냥 포기할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까?’라며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이며 문제를 만들어낸다. 대부분은 결국 그것으로부터 도망가게 하거나 회피하게 하면서 말이다. 


  마이클 싱어는 “삶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받아들이면 두려움을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두려움은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할 필요가 없다. 두려움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 이 가능성을 탐사해보려면 먼저 두려움 그 자체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라고 했다. 내가 운전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장거리 운전을 피할 수 있을까? 그냥 그럴 일이 생기면, 해보면 어떨까? 나는 왜 운전을 두려워하게 된 거지? 두려움을 피하라는 마음의 지껄임을 버리고 두려움 자체를 살펴보니 두려움이 시작된 기억을 찾게 되었다. 9년 전쯤 운전면허를 따고 한참 운전에 재미 붙여 신나게 다닐 때였다. 노란불에 교차로를 건너려다 보행 신호가 바뀌자마자 뛰어 달려 나온 아이를 칠 뻔했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그 뒤로 운전은 내게 두려움이 되었다. 그래서 줄곧 운전을 하지 않다가 3년 전 파주에 살기 시작하면서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지금도 조성되고 있는 신도시 구역이라 차가 없으면 많은 불편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서 10분 거리의 직장, 마트 같은 곳만 운전했다.


  마이클 싱어는 두려움이 만들어진 원인을 ‘마음속의 가시’라고 표현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마음속의 가시에 대한 두려움이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다. 마음속의 가시는 과거로부터 막힌 에너지일 뿐이므로 풀어놓을 수 있다. 이런 에너지들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면 그것을 속에다 감추지 말고 당신을 지나가게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면 그 경험은 곧 지나가고 다른 것이 나타날 것이다. 그저 그 모든 것을 즐기면 된다.” 내 안의 진짜 나의 시선으로 두려움을 마주 대하고 나를 지나가는 것과 그 지나간 자리에 들어오는 다른 것을 그저 즐기면서 지켜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독서모임이 있던 날, 우리는 두려움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진실된 이야기에 서로 공감하며 격려하고 응원했다. 그래서 나도 회원님들로부터 에너지를 얻어 마음속 가시를 빼내리라 다짐했다. 운전하는 두려움에 대한 마음의 지껄임이 나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지 않도록 이 두려움을 지나가게 하기로 했다. 그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들어오는지 보고 싶었다. 다음은 며칠 뒤 독서모임 카페에 내가 올린 글이다.


 「파주에서 포천에 있는 연수원에 3박 4일 연수를 가게 되었어요. 원래 연수원까지는 남편이 태워주겠거니 하는 계산이 있어서 멀어도 신청한 것이었는데 하필 그날 남편도 중요한 행사가 있어 제가 운전을 하거나 연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상처 받지 않는 영혼> 독서모임의 효과로 한 번 가보자 용기를 내었습니다. 낯선 길을 단번에 가보자는 것은 무리이니 토요일 독서모임이 끝나자마자 남편과 딸을 태우고 포천 연수원까지 운전해보았어요. 날이 어두워지고 반대 차선 라이트에 익숙하지 않아 30분 남겨두고 남편이 운전했어요. 끝까지 성공하진 못했지만 맛있는 이동갈비도 먹고 뿌듯한 맘으로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고 오늘. 운전이 걱정되긴 했나 봅니다. 잠을 설치고 개운하지 않은 기분으로 포천으로 출발했습니다. 처음엔 긴장되고 손에 땀도 나고 했지만 점차 속도에 나를 맞추고 길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갔습니다. 그랬더니 한 폭의 수묵화 같은 풍경도 보이고 웅장한 다리도 지나고 파란 하늘 속으로 달려가는 짜릿함도 느끼면서 안전하게 도착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감사글을 써봅니다. 내 마음속 두려움 중 하나를 흘려보내어 더 넓은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 독서모임에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옆 도시인 일산에 사는 친구를 교통편 걱정 없이 자유롭게 운전하며 만나러 가고, 출장을 갈 때는 미안한 마음으로 태워 달라 동료에게 부탁하지 않고 내가 운전해서 동료와 함께 동행하며, 친구와 함께 가는 강화도 여행도 내가 운전해서 다녀왔다. 두려움을 지나 보냈더니 삶의 영역이 넓어졌고 그래서 찾아지는 행복도 더 많아졌다. 지금으로도 나의 성장은 충분히 이루어진 것 같아서 만족스러운데 다음 독서모임에서는 무엇을 더 얻게 될지 기대되고 설레었다. 누군가 그랬다. 진짜 좋아하는 일은 설레는 것이라고. 나는 독서와 독서모임을 진짜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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