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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서 Nov 09. 2019

10. ‘나답다’ 던져 버리기

by 한순범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과 자아실현에 대한 여정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어느 새벽, 고요히 깨어난 나는 몽롱한 정신의 형체들을 하나씩 더듬어 의식을 이어갈 때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지금도 행복하지 않다. 앞으로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잠깐의 행복이야 소소히 있었지만, 꽤 길게 지속되었던 행복감은 없었다. 거의 대부분 불안했고 긴장했고 예민했다. 그래서 금세 행복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직장에서 잘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동료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지고 오해가 생기며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더구나 가정에서는 무던한 남편의 무심한 반응으로 화가 나기 일쑤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이 소개해준 분께 사주를 본 적이 있다. 그분이 말씀하시길 “당신은 한겨울의 에어컨 같은 사람입니다. 한겨울에 에어컨이니 얼마나 춥게 만들겠습니까? 무엇이든 잘하려고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이 될 거예요.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냥 저녁에 뭐 먹을까? 주말에는 뭐 하고 놀까? 이런 생각만 하세요. 그렇게 해도 풀릴 일은 다 풀립니다.” (한참 동안의 공부 후에야 이 말이 진리임을 깨달았다.) 


  그날 새벽, ‘더 이상 이렇게는 안 돼.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치열히 고민했다. 그때껏 한 번도 행복해지려고 노력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했다. 사실은 독립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나이 때부터 항상 ‘내가 원하는 것이 뭐지? 즐거운 것이 뭐지?’ 되물으며 행복하게 살려고 애를 썼으면서도 말이다. 그 노력의 하나로 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이고. 독서는 늘 나와 함께 하던 동반자였다. 습관처럼 틈만 나면 손에 책을 들고 읽을 정도로 책을 좋아한다. 나의 방엔 채 읽지도 못한 새 책들이 쌓여갈 정도로 책 욕심도 많다. 그동안 행복한 삶의 지혜를 얻기 위해 찾아 읽은 책이 몇 권인가?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1000권 이상은 되지 않을까? 그런 많은 책을 읽었으면서도 지속적인 행복의 비밀은 알지 못했다. 분명 책을 통해 성장해가고 있는 부분이 있긴 했지만 어떤 벽에 가로막혀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읽은 책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어떤 논리를 펼 때 인용은 많이 해 보았다. 하지만 한 번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다. 나는 그동안 너무 나만의 독서에 갇혀 있었던 건 아닐까? 책을 통해 감동을 얻고 교훈을 얻고 지혜를 얻는다지만 그건 나만의 해석과 이해로 받아들여지는 아주 편협한 것들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행복한 삶의 지혜를 얻고자 책을 읽었음에도 해답을 얻지 못한 채 제자리를 뱅뱅 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나라는 틀에 갇혀서 더 나아가지 못하면서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 나와 같을까? 다를까? 다르다면 도대체 어떤 관점에서 달라지는 거지? 


  끝없이 이어지는 나의 간절한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독서모임 가입 신청 글을 보게 되었다. 더구나 가입 신청을 받는 이 독서모임의 이름이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이지 않나? 나를 깨우는 독서모임이라. 어쩌면 그동안 알아채지 못한 나의 진짜 모습이 따로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나를 깨우면 행복해지는 길을 찾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독서모임에 용기를 내어 가입 신청을 함으로써 그렇게 행복으로 가는 출입문을 열게 되었다.


  나는 교사다. 경력 21년 차의 초등교사다. 대한민국 학령기의 표준 코스를 밟아 제때 대학에 들어가고 제때 교사 발령을 받았다. 내 인생에서 딸아이를 낳으며 병원 신세를 졌던 6개월을 빼고는 단 한 번도 일을 쉰 적은 없다. 그렇다고 줄곧 내내 한국의 학교 현장에서 근무했던 건 아니다. 경력 10년 차에는 6개월 어학연수로 혼자 호주에서 생활했었다. 15년 차에는 재외 한국학교 근무로 딸아이와 둘이서 2년간 베트남에서 살기도 했다. 또 결혼 전에는 에어로빅 강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고, 3년 정도 살사댄스에 빠져 서울을 오가며 열정적으로 배우기도 했다.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며 나에게 온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 뒤처지지 않는 교사가 되기 위해 거의 매번 학교에서 연수를 가장 많이 받는 교사라는 타이틀을 얻고 있다. 영어교육으로 대학원 석사도 했고, 국제 영어교사 자격증도 땄고, 영어연수에서 강의도 하면서 인정도 받았다. 여행을 사명처럼 다니며 골프도 즐긴다. 술 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음...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들을 나열하는 것은, 나는 예상 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의 바르고, 조금은 지루한 교사 타입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즉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 시도들은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그런 시도들이 밑받침되었기에 나를 깨워줄 독서모임의 참여 기회가 나에게 왔을 것이다. 간절히 원했기에, 열심히 살았기에, 그렇기에 행복을 찾아줄 독서모임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첫 독서모임에서 모임의 리더인 작가님과 다른 회원님들을 봤을 때 매우 긴장하고 경계가 되었다. 그건, 그 날 우리가 나누었던 첫 책 때문이었다. 사실, 독서모임에 들 때 인문학 서적 위주의 독서가 될 거라 기대했었는데 첫 책부터 너무 이상했다. 이제 그 해괴했던 첫 책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아니타 무르자니의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는 독서모임을 하지 않았다면 내 생이 끝날 때까지 전혀 손길이 닿지 않았을 종류의 책이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내가, 종교에도 관심이 없었던 내가, 사후세계 따위 허구의 이야기라 막연히 생각했던 내가 읽기에는 너무도 영적인 책이었기 때문이다. 독서모임의 첫 책으로 선정된 이 책을 읽다가 놓아버리기를 몇 번, 머릿속엔 ‘말도 안 돼.’라는 지껄임만 소용돌이쳤다. ‘그래도 오랜 고민 끝에 용기 내어 시작한 독서모임이니 첫 책이라도 해보고 그만둘지 결정하자’ 하는 마음으로 읽어내었다. 끝까지 읽고 독서모임에 참여했을 때, 리더인 작가님이 나에게 어떻게 읽었는지 물었다. “전혀 공감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의 편협하고 갇힌 생각을 깨달았다. 나와는 다른 경험치를 가진 몇 명의 회원들에게는 이 책이 주는 깨달음과 감동이 진하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그 회원의 상황이었다면 정말 그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아니타의 경험만큼은 아니지만, 사실 나에게도 딸아이를 낳으며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고, 그로 말미암아 6개월 병원 신세를 지면서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었다. 다시 건강해져 딸아이를 돌볼 수 있다면 열심히, 착하게 살겠노라 매일매일 기도하지 않았었나. 종교도 없으면서 무조건 ‘신이시여’ 부르며 간절히 기도했었다. 그게 벌써 14년 전 이야기니 그때의 간절함이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덕분에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엄마, 아내, 딸, 교사라는 사회적 역할에만 열심히 살고 있었다. 그것을 잘하면 내가 행복해질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그 테두리 안에서 ‘나답다’라는 정형화된 틀을 만들고 그것에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나 자신을 옭아매었다. 그 날 독서모임을 통해 나를 싸고 있던 견고한 ‘나’라는 틀에 대해 알아차리기 시작했고 조금씩 금을 내기 시작했다.


  인도의 전통적이고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자란 아니타는 암에 걸려 죽음에 이르렀을 때 한 임사체험에서 자신을 망가뜨린 건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삶으로 돌아왔을 때 현실을 바깥에서 보지 않고 내면에서 보는 관점으로 두려움 없이 아니타 자신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 아니타의 눈에 사람들은 즐기고 감사할 만한 아름다운 것들이 무척이나 많은데도 모든 것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불편했다. 즐겁지도 않은 일을 하느라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타의 눈에 보이는 그 사람들 속에 내가 있었다. 나는 주변의 일을 심각하게, 진지하게, 예민하게 받아들이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 나머지 즐기고 감사할 만한 일들은 알아채지도 못한 채 흘려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힘들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나는 책임감이 높다. 완벽주의자이다.’ 몰아 대며(사실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기 위해) 꾸역꾸역 해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아니타가 책머리에서 자신의 임사체험을 쓰는 이유가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돕고 싶을 뿐이고 사람들이 삶의 여정에서 날마다 기쁨을 발견하며 삶을 사랑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처럼, 임사체험이야 여전히 나에겐 불편한 이야기지만 나는 첫 독서모임 책에서 한 가지를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 나의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발견해보자.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편인 나는 매일 침대에서 빈둥대며 오늘 할 일이나 스마트폰으로 뉴스 등을 찾아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부터는 나에게 주어진 온전한 이 아침 시간, 대략 5시부터 6시 30분까지니까 1시간 30분 동안의 시간을 나를 위해 써보기로 했다. 내가 즐거워하는 일로 채워보자. 우선, 독서를 하면 좋겠고, 운동도 하면 좋겠다. 그리고 나를 더 잘 알기 위해 명상도 해보면 좋겠다. 그래서 일어나면 우선,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유튜브 영상을 활용해 요가 스트레칭을 하고 명상도 했다. 그리고 책을 읽었다. 그렇게 며칠을 하다 보니 기록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공책을 마련하여 아침 시간을 기록해나가기 시작했다. 기록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삶을 성찰하게 되고 나의 아침 시간은 점점 더 충만해져 갔다. 이제는 감사 일기도 적는다. 감사할 일을 떠올려 적다 보면 자연스레 기쁨을 발견하게 되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이 늘어났다.


  그즈음, 인터넷 서점에서 나도 모르게 장바구니에 담겨(아마도 잠결에 담지 않았을까) 다른 책과 함께 배송되어 온, 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바로 오카다 다카시의 「예민함 내려놓기」이다. 일본인 정신과 의사가 쓴 책으로 논문 형식의 글이라 내가 선호하는 분야는 아니니 내 의지로 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나에게로 온 책이니 읽어는 보겠다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지금까지 ‘나’라고 알고 있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자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어렴풋이 나의 문제점을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하게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문제가 있다니. 다른 사람들이 문제지. 불편해지면 안 보면 되지. 나와 맞는 사람과 지내면 될 뿐이야. 그런데 왜 사람이 바뀌어도 사람 사이의 문제는 계속되고 그럴 때마다 내 마음은 이렇게 불편하고 힘든 것이지? 더구나 15년을 함께 산 남편 하고도 끊임없이 반복되는 불편한 다툼들. 이 뫼비우스의 띠를 정말, 간절히, 끊어내고 싶었다. 그래서 절실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갔다. 


책에서 애착 불안 체크리스트가 있었는데 나의 애착 불안 점수는 매우 높은 불안형이었다. 반면, 남편은 전형적인 애착 회피형으로 예민한 나와는 달리 둔감한 사람이었다. 예민한 불안형은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지나치게 신경 써서 상대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상처 입거나 불안해한다. 더구나 가장 의지하는 상대를 뜻대로 할 수 없을 때 상대를 질책하고 비난한다. 이것은 더 사랑해달라는 본래의 의도와는 달리 관계를 깨뜨려버린다. 둔감한 회피형은 자잘한 것에 신경 쓰지 않고 끈기가 있어서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하는 이점이 있지만, 관심사가 아닌 것은 개의치 않음으로써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다. 「예민함 내려놓기」에서 예민한 아내와 둔감한 남편의 사례가 나온다. 딱 우리 이야기이다. 우리의 문제는 이렇게 돌고 돌았던 것이다. 내가 남편에게 부탁을 하거나 대화를 시도할 때 남편은 무뚝뚝하게 대답하거나 무관심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시당한다는 스트레스를 받아 화를 내게 되었다. 남편은 자신은 나쁜 짓을 한 기억이 없는데 내가 갑자기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내가 기대려고 했을 때 무뚝뚝하게 대한 것이 방아쇠가 된 줄도 모르고.


  이 책을 읽고 정말 많은 생각들이 차올랐다. 일단, 나의 예민함은 애착 불안으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애착 불안은 어머니의 변덕스러운 성격과 차가운 모정에 의해 양육되어온 탓이다.(후에 독서모임의 다른 책을 통해 더 이상 어머니를 탓하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으로 인해 두 남동생을 어릴 때부터 챙겨야 했던 장녀로서의 위치, 학업적으로 뛰어난 딸이 되지 않으면 대학은 두 남동생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일 뿐이었던 가정환경에서 나는 생존해야 했다. 혼나지 않으려면 어머니가 시킨 일들을 해내어야 했고, 공부를 아주 잘해야만 했다. 그렇게 주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사투를 벌이며 성장했다. 그 후 나는 모든 일의 목적을 타인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 두었고, 그로 인해 예민해졌으며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나는 두 가지를 실천했다. 


  하나는 책을 들고 남편에게 가서 “나는 당신이 이 책을 읽기를 원해. 당신과 나에 대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대화를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2주 후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각각의 성장기의 상처가 남겨놓은 생채기(남편은 남편대로 둔감해질 수밖에 없는 개인사가 있었다.)를 더 이상 탓하지 않고 보듬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가 그러할 수밖에 없는 부분에 대해 좀 더 여지를 갖고 배려해줄 정도로 관계가 편안해졌다.(이런 경험은 후에 가족 독서모임으로 발전하게 된다.) 물론 아직도 아주 가끔은 무심코 툭툭 튀어나오는 남편의 무심함에 ‘욱’ 할 때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좋아졌다. 두 번째는 가족, 친구, 동료들에게 의지하고 바라던 많은 것들을 하나씩 분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로부터 인정받을 때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의존적인지, 얼마나 단편적인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늘려가며 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좋아지고 있는 중이다.


  나를 감싸고 있던 아주 두껍고 갑갑한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었다. 당연히, 두 번째 독서모임에도 열렬히 참여하게 되었다. 조 비테일과 이하레마카라 휴 렌의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은 감수의 글에서 하와이 인들이 믿는 치유와 정화를 가져오는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힘, 그리고 ‘평화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라는 말의 의미를 가슴으로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한다. 호오포노포노의 핵심 메시지 ‘온전한 책임’ ‘자신의 내면과 친해지기’를 깊이 깨닫게 되길 바라며 책을 읽어나갔다. 첫 번째 책 보다 훨씬 영적인 책이라 논리적 이유 찾기가 습관화되어 있는 나는 많은 노력을 들여 열린 마음을 갖고 읽어야 했다. 읽다 보니 어느 순간 논리라는 것 자체도 내가 가진 기억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자 책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어졌다. 희한하게 바로 전에 읽었던 ‘예민함 내려놓기’ 라던가, 근래 다시 찾아보게 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요즘 한참 불교 경전과 철학책에 빠져 읽고 공부하고 있다던 동료와의 대화, 이 모든 것이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였다. 주변의 모든 것이 나에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 책에 나오는 ‘우주는 너무 자비로워서 그가 배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스승을 보낸다’라는 말처럼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이 이어져 같은 이야기를 하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깊게 배웠다.


  특히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에서 나의 내면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예전의 비통한 사연을 정화하고 내면을 텅 빈 제로 상태로 만든 뒤 그곳을 사랑으로 채우라는 부분이 와 닿았다. 나에게 있어 예전의 비통한 사연이라면 아무래도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성장기의 상처 들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한 아픔, 혼나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 했던 순간들, 가차 없는 호된 훈육들. 이러한 기억들이 내면에 자리 잡아 예민한 ‘나’, 타인의 인정이 필요한 ‘나’라는 틀을 만들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책에서 말한 것처럼 기억들이 문제를 일으킬 때 나에겐 선택권이 있다. 그것들에 얽매인 채로 지내거나 그것들을 변화시키고 풀어내 달라고 신성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침 명상을 할 때,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되뇌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건 나의 책임이다, 내가 기억을 붙잡고 놔주지 않은 나의 전적인 책임이다’라면서 내면을 치유하기 위해 애썼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나를 낳고 정신없이 삼 남매를 키우는, 일하는 여성으로 젊은 날을 허무하게 흘려보냈던 어머니가 측은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도 어머니라는 역할이 처음이라 서툴렀을 것이리라. 나도 딸아이에게 실수하는 엄마, 잘못하는 엄마일 때가 있는 것처럼 어머니에게도 완벽한 어머니상을 바라지 말자.’ 깨달아졌다. 이제 나를 그토록 잡고 있던 예전의 비통한 사연은 희미해져 갔다. 그동안의 ‘나’라고 믿었던 것은 내 기억이 붙잡고 늘어졌던 허상이었을 뿐.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지도 못하고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좁은, 아주 한정된 경험으로 만들어진 ‘나답다.’라는 것들이 더 이상 믿어지지 않았다. ‘나답다.’는 것은 내가 만든 틀이며 결국 그것을 깨야 한다.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이 제일 중요한 과제인 것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나는 한 걸음 성장해갔으며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의 ‘어떤 사람은 늘 깨어있고 그들의 삶은 경이로움의 연속이다.’라는 말처럼 나는 경이로운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나를 깨우는 독서에 더욱 심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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