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현재와 같은 신조 또는 사고방식을 가진 두 번째 이유는 군복무 시절 경험입니다.
평소에 들어보지 못했던, 지금은 해체된 부대에 배정받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허세뿐인 '군기'라는 것이 강한 부대였기에 제가 들어갔을 때에도 아직 폭력이 남아있었습니다. 같은 기수 동기도 없이, 섬에 있는 기지로 발령 났다는 것을 처음 들었을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막상 기지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생활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이 악물고 버틸 수밖에 없는' 하루하루가 이어졌습니다.
'내가 분대장이 된다면, 내가 선임기수가 된다면 이 부조리 다 없애버릴 것이다'라는 마음 하나로 빨래를 ㅏ하고, 대걸레를 손으로 빨며 새벽같이 일어났습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이 흘러갔더라도 결국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저도 어느새 이등병 때 그렇게 멀게만 보였던 선임 기수들도 전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제가 군생활 때 겪은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그때의 기억들은 저에게 미화될 수 있는 추억도 아닐뿐더러 '지나고 보니 그때 선임들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라는 식의 말은 꺼내기도 싫은 순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대장을 잡고, 저와 생각이 같았던 근기수 선후임들과 함께 조직 문화를 조금씩 조금씩 고쳐 나갔습니다. 대걸레는 손이 아닌 도구를 사용해 닦고, 각자의 빨래는 스스로 챙기고,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니 신병들을 모아 반복하여 설명하였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곪은 부분은 있기 마련이기에 생각이 같지 않은 후임과 선임들이 있었습니다. 계급이 깡패라고, 저 보다 높은 기수의 선임들의 생각을 바꾸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럽고 당한 것이 있기에 자신도 누려보자는 생각. 이해는 어느 정도 되지만 전혀 공감할 수 없는 그런 생각을 가진 생각보다 많은 선임과 후임들. 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진 거야'라고 자위하며 그들의 비틀린 욕구를 정당화하고 이전 기수들의 좋지 않은 행동거지들을 조금씩 흉내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참으로 상대적입니다. 모래밭 가운데 민들레는 눈에 잘 띄고 너무나 아름답고 귀엽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꽃가게로 들어가는 문턱 아래에 핀 민들레는 초라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아름다움의 개념이 아닌, 추함과 비참함과 같은 부정적인 개념으로 넘어가면 이 상대적인 감정들은 에너지가 넘치는 감정의 배로 다가오곤 합니다. 점차 좋아지는 전반적인 군생활 속에서 소위 찍힌, 바꿔 말하면 순하고 착하기에 먹잇감이 돼버린 아이는 주변 생활을 보며 더 비참한 마음을 느꼈었던 것 같습니다. 저 나름대로 챙겨준다고 노력했지만, 기수 차이가 꽤나 나는 그 아이를 제가 매번 쫓아다니며 보호해 주기는 너무 어려웠습니다. 선임들이 그 아이를 때리려고 하면 차라리 날 때리라고 해보기도 하고 내가 가르치겠으니 신경 끄라고도 해보았으나 저희들끼리 편을 먹은 집단은 저 혼자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는 해가 쨍쨍한 여름날 스스로 날아갔습니다.
차가워진 그 아이의 모습은 또 다른 저의 후임들이 발견하여, 소리치고, 뛰고, 울고, 침묵했습니다. 나도 이제 군생활 좀 여유롭게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한 지 몇 주도 안된 것 같은 그날, 저는 그 아이를 담은 들것을 함께 옮겼습니다. 우울증을 앓던 그 아이는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상담치료 종결 소견서를 받은 뒤 3주 뒤에 자신을 더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나 때문인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었나?
내 방식이 잘못되었나?...
끊임없이 조사관들과 이야기하며 스스로에게 되물었습니다.
제 기억 속에 있는 그 아이와 나눈 대화 내용들이 실제 내가 나눈 이야기들인지 아닌지도 헷갈릴 정도로 기억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내가 그 아이게 말뿐만이 힘을 준 것은 아닌지, 결국 나도 방관자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 당시에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한 것이 맞는지...
그렇게 온몸으로 감투의 무게를 통감하고 있을 때 추도사를 읽었습니다. 부대장이 적어 준 상투적인 말 뿐인 추도사는 읽기 싫어 제가 직접 추도사를 적어 두 번 접어 가슴속에 넣었습니다. 발인일에 구겨진 종이를 멈출 줄 모르는 떨리는 손으로 펼쳤습니다.
“00야”,
한마디 하자마자 참았던 울분이 뛰쳐나왔습니다. 입술이 떨리는 것이, 숨 가빠하는 것이, 눈물이 멈추지 않는 것이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미안함 때문일 수도, 무서움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쉽고 그리운 마음도 이유 중 하나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그날의 기분은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든 추도사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한 단어씩 한 글자씩 이어나갔습니다. 무어라 말했는 기억도 안 나지만 가까스로 추도사를 마치고 영정 앞으로 걸어가 거수경례를 했습니다. 충성.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충성.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나온 것은 제가 거수경례 후 뒤 돌아 걸어가려 할 때였습니다. 저에게 매달려 '너가 조금 더 잘해주지, 너 이야기 많이 했는데, 너가 챙겨준다고, 너가 좀만 더 잘해주지, 신경 써주지...' 라며 뚝뚝 끊기는 말을 하며 무너지는 가장 앞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물 같은 소리로 '죄송' 비슷한 말을 웅얼거리며 이를 꽉 다무는 것이었는데 이 마저도 눈앞에 형상을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어 잘 해내지 못했습니다. 다른 가족들이 뛰어나와 저와 가장을 떼어낸 이후 기억은 잘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장례식이 마무리되었는지 어떻게 부대로 복귀하여, 그날은 무엇을 했는지 도대체 하나도 기억나지가 않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조사가 진행되며 사건은 제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는데, 저는 참고인에서 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저를 가해자로 지목해서 헌병으로, 법원으로 불려 다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