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팅이라는 총에 굴복하다.
올림픽대로를 지나다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커다란 크기의 옥외광고판이 보인다.
지금은 TV도 없고, OTT 서비스를 이용하지도 않아서 관심이 전혀 없음에도, 신작 영화와 드라마를 보던 예전 습관들 때문인지 한 번쯤 시선을 주게 된다.
마케팅. 마케팅은 사실 이 시대의 강력한 무기다. 사람들을 유혹하는 무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총, 칼 같은 더 날 것의 무기다. 마케팅은 우리에게 그 대상을 강요한다. 넘쳐나는 콘텐츠와 상품들, 그러나 개인에게 한정적인 시간. 그 시간들을 자신들이 차지하도록 마케팅은 끊임없이 우리를 협박한다. 한 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어디서나 보인다. 옥외광고판에 이어 지나가는 버스 옆 포스터, 인터넷 배너에서도 보인다. 그리고 각종 기사 제목과 유튜브 콘텐츠 썸네일에까지 그들의 흔적이 퍼져나간다. 그렇게 우리는 결국 그 상품을 소비해야 하고, 소비가 끝나고 나서야 그 강압적인 마케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자리는 곧바로 다른 상품이 채운다. 마케팅의 노예가 된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비단 영상뿐만이 아니다.
이 시대를 대변한다는 책 또한 마찬가지다. 순서대로 채워진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 칸의 책들은 나에게 이 책을 집어 들라고 강요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책이니 너도 시간을 내서 읽어야 한다'라며 대놓고 협박한다. 그렇게 압박을 못 이기고 구입한 베스트셀러 칸의 책들 중 책장에 그대로 꽂혀 있는 책들이 몇 권이나 될까?
베스트셀러 칸이 아니고서라도 마케팅하는 곳은 많다. 많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책들처럼 그냥 놓여 있지 않은 것은 모두 마케팅이다. 인터넷 창에서 좌우, 위아래에 뜨는 광고, 배너창들처럼 오프라인 서점에서의 가판대 역시 배너창과 같다. 많은 부분이 광고비를 받고 세워주는 자리다. 다른 책들과는 조금 다르게 진열되어 있다면 그 또한 광고다. 그리고 그 광고는 우리의 돈과 시간을 내놓으라고 강요한다.
영화, 드라마, OTT 콘텐츠들과 책은 비슷한 점이 하나 있다. 모두 자신이 직접 소비해 보기 전에는 그 가치를 판단하기 어렵다. 돈과 시간을 들여 직접 봐야 비로소 좋고 나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케팅의 협박에 순순히 따라서 소비한 것들의 결말은 대부분 실망스럽다. 마케팅의 강요에 누구보다 빠르게 체념하고 받아들여서 소비하곤 후회하게 된다. 마케팅의 협박에 1~2주만 견디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토대로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성급한 나는 직접 경험하고 후회하는 쪽을 택하곤 한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면서 그럴싸한 홍보문구와 함께 진열되어 있는 책은 한 번씩 집어 들기 마련이다. 눈앞에 보이는 책이 수백, 수천 권인데 그중 가장 좋은 지식을 주는 책을 효율적으로 고르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책들은 내가 기대하는 그런 좋은 책일 가능성은 의외로 낮다. 이 사실을 알고서 집어 들어야 한다. 지식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무작정 신뢰해서는 안된다. 출판업계는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면 안되고, 실제 사람들의 인기 때문에 그 자리에 진열되어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된다. WHY? '왜 저 자리에 저 책이 있을까? 왜 저 책은 저렇게 진열해서 눈에 잘 띄게 했을까?'라는 의문을 품었으면서, '인기가 많은 책이어서 그런가 보다. 여기 MD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서 밀어주려나 보다.'라는 답을 내리면 안 된다. 대형 서점의 책 배치가 마치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결과인 듯 보일 수 있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을 믿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 글을 보고 난 후 찾아간 서점의 풍경은 이제 다르게 보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