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 250달러였던 나를 호구 잡아 200달러나 쓰게 했던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소주 4병의 거사를 치른 그날이 그녀의 어학원 마지막 날이었다. 만약 학원에서 다시 마주치더라도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에게 "그녀를 조심하세요. 저 호구 잡혔었어요."라고 말해줄 수도 없었을 테니. 차라리 더 이상 마주치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술을 마신 다음날 눈이 번쩍 뜨였다. 내 지갑 속 남은 50달러를 꺼내 바닥에 놓고, 허탈해했다. '어떡하지..' 그녀 때문에 내 전 재산은 50달러가 되었다. 그녀 때문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저 꽃뱀 같은 사기꾼에게 당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내가 무척 호구스러웠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다행히 2주 치 집세와 생활비는 납부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2주 후에는 다시 생활비를 내야 했다. 모든 비용을 2주마다 처리하는 시드니에서 지금 당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더라도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건 2주 후였다. 다음 생활비를 지불해야 하는 시간까지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술이 깰 틈도 없이, 어제 무슨 일을 겪었던 건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인터넷으로 일자리를 찾아봤다. 영어를 능숙하게 할 수 없는 내가 할만한 일의 종류는 한계가 있었고, 생각보다 사람을 구하는 곳도 많지 않았다. 그중 한 군데가 눈에 띄었다.
"한인 식당. 남자 서빙 구함. 시급 10달러."
10달러면 영어를 잘 못하는 사람들이 받는 급여였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들은 카페에서 일해도 시급 20달러는 받고, 주말에는 주말 수당까지 받았다. 하지만 나는 아직 현지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는 것이 두려웠다. 영어를 못하는 건 아닌데, 자신감이 없었고, 자신감의 결여는 나의 귀를 막았다.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들었을 때, 'Can you speak one more, for me?'라고 물어보는 게 두려웠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10달러의 시급은 충분하다며 합리화했다.
이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손에는 단 50달러만 있었다. 그리고 지금부터 일을 해도 2주 후에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숙소에 쌀과 라면, 통조림 등 숙식을 위한 최소한의 물건들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커피 한잔도 참아야 하는 시간이 왔다. 그래서 바로 구인광고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했다.
다행히 아직 사람을 구하기 전이라고 한다.
토요일 낮 4시.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식당으로 향했다. '제발 일만 하게 해 주세요.'라는 마음으로 식당 사장님이 나를 마음에 들어 하길 기도했다. 알려준 주소에 도착했을 때,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입구 쪽을 향해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면접을 보러 온 다른 청년이 있었다.
'아뿔싸, 경쟁자가 있는 거였구나.'
면접을 본 청년이 가게를 나가고, 굵은 펌에 단발 스타일의 여사장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질문 몇 가지를 했다.
"서빙해 봤어?"
"네, 한국에서 해봤어요."
"호주 언제 왔어?"
"지난달에 왔어요."
"그럼 아직 오래 있을 수 있겠네?"
"네, 최소 6개월은 있을 거예요."
"오늘부터 바로 일 가능해?"
"오늘이요?"
"응, 이따가 9시까지 와."
"네."
카리스마 넘치는 여사장님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군더더기 없이 실용적이었다. 정확히 필요한 게 무엇인지, 원하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서빙 경험이 있는, 최대한 오래 일할 수 있는 워홀러', 여기서 '서빙 경험'과 '최대한 오래 일할 수 있는' 둘 사이의 중요도를 따지자면, 분명 후자였을 거다.
시드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워킹 홀리데이를 온 사람들은 매우 매력적인 자원이었다. 워홀러들의 수명은 1년인데, 저렴하게 노동력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유일한 단점은 오래 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1년이라는 비자 기간 동안, 아르바이트만 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청춘의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여행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시로 사람을 새로 뽑아야 하는 여사장의 질문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앞서 면접 본 사람 대신 나를 뽑은 이유는 아마 내 비자 기간이 더 오래 남았기 때문이었을 거다.
일하게 된 곳은 정확히 한인 식당은 아니었다. 식당의 정체성이 특이했다. 오전부터 낮까지는 현지인들을 상대로 하는 카페고, 현지인들이 퇴근하고 집에 돌아간 시간인 4~5시부터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코리안 스타일 펍'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인 실내 포차'로 바뀌었다.
홀의 조명이 두 스타일이었다. 낮에는 카페에 맞는 환한 조명을 켜고, 저녁부터는 술집에 어울리는 붉은 조명을 켰다. 주방에는 유학생활을 하는 나이 많은 형 한 명이 음식을 모두 도맡았고, 홀에는 저녁부터 밤 12시까지 서빙을 하는 형 한 명, 그리고 밤 10시부터 새벽 3시 마감까지 담당하는 내가 일하는 구조였다. 간판에 한국 스타일 술집이라고 써놓지도 않아서, 현지인들은 여기가 밤마다 뭐 하는 곳인가 의아해했다. 가끔 술 취한 사람들이 늦게까지 여는 카페인 줄 알고, 음료를 사러 들어오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호주에서 오래 산 한국인들이 가끔 술을 마시러 오는 식당이었다.
한국인들이 많이 가는 술집들이 있는 메인 거리와 많이 떨어져 있어서, 한국인 유학생들이나 워홀러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특별히 저렴하거나, 음식이 맛있거나, 특색 있는 곳도 아니었기에 오래된 한국인 손님도 적었다.
항상 잘 차려입고, 단정하게 세팅된 헤어와 메이크업으로 품격 있는 모습을 유지하시는 사장님은 실내포차와 같은 이곳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가게에 자주 나오시지는 않았지만, 일주일에 2~3일 들르실 때마다 위화감이 느껴졌다.
"형, 사장님은 뭐 하시는 분이에요?"
"거의 호주 이민 1세대이신데, 여기 건물 위에서 여행사도 하셔."
사장님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반드시 지인들과 함께 술 한잔 하러 오셨다. 함께 오는 분들은 비슷한 연령대이거나 더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었는데, 호주에서 사업을 하면서 오랫동안 살고 계신 분들 같았다. 평소 무뚝뚝하고 카리스마 있어 보이던 사장님은 지인들을 모신 자리에서만큼은 잘 웃고, 사근사근한 사람이 되셨다.
"어머, 사장님~내가 오늘 좋은 술 꺼내올게."
"난 그냥 소주면 되는데, 허허허"
"진짜 귀한 와인이 들어왔거든요, 특별히 오늘 오픈할게요!"
사장님은 손님들에게 술을 권하기 시작했다. 와인이 한 병, 두 병.. 쉴 새 없이 건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Alex, 치즈 좀 더 갖고 와."
"Alex, 와인 한 병 더."
"Alex, 여기 테이블 한 번만 정리해 줘."
"Alex~~"
"Alex~~~"
"Alex!?"
아마 호주에서 내 영어 이름이 가장 많이 부른 사람은 사장님이었을 것이다. 뒤를 돌아서면 들리던 'Alex'라는 부름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었다. 한국의 그녀가 지어줬던 영어 이름이 듣기 싫을 정도였으니까.
손님들이 얼큰히 취한 상태가 되면, 사장님은 붉어진 얼굴로 나에게 다가와서 슬쩍 말했다.
"와인 한 병에 200달러 찍어놔."
네? 아까 와인은 사장님이 쏜다고 하신 거 아니었나요? 사람들 의향도 안 물어보고 두 병, 세 병, 와인을 계속 꺼내시길래 사장님이 지인들에게 대접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달아놓으라니. 그것도 한 병에 200달러씩이나!? 와인샵에서 2~30달러면 사는 와인을요? 강도도 이런 날강도가 없었다. 성인 네다섯 명이 두세 시간 동안 실내포차 분위기에서 잡다한 안주와 와인을 즐긴 청구서는 어느새 1,000달러는 훌쩍 넘어 2,000달러가 되어갔다. 사장님은 한 번씩 계산대로 와서 매출이 얼마나 되었는지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잔뜩 취해 흐느적거리며 나갈 때, 사장님이 잊지 않고 한마디 했다.
"사장님~~ 오늘 먹은 건 장부에 달아 놓을게요~~"
내가 당했던 소주 4병, 200달러의 경험이 떠올랐다. 이게 쉽게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본능인가? 와인을 강매당하는 저 사람들도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느끼고 있겠지? 그녀가 소주 3병, 4병까지 시킬 때, 아무 저항을 할 수 없던 나와 같은 부류겠구나. 휘청이며 나가는 남자 사장님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약육강식'.. 아니, '약호강식'이었다. 아무 저항하지 않는 약한 사람은 호구였고, 뻔뻔함이 강한 사람은 호구를 잡아먹는다.
이런 날이 일주일에 적게는 하루, 많게는 이틀 정도 되었다. 그리고 1년 뒤, 농장을 다녀와서 한국에 돌아가기 전 찾아갔을 때, 이 가게는 사라지고 없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이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잘 되지 못할 거라는 믿음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물론, 여사장님은 여전히 여행사에서 새로운 호구를 찾고 있었을 테지만 말이다.
호구를 노리는 존재들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등장한다.
다음은 농장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