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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X들 3-1. 돈이 모이는 곳에 그들이 모인다.

by 라텔씨

나를 지인 술집에 데려가서 소주를 사게 만들었던 그 X와 지인들에게 와인을 마시게 하고 폭리를 취했던 한인 술집의 그 사장 X는 몇 가지 닮은 부분이 있었다. 하나는 돈을 좋아한다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얼굴 표정이 대체로 태연했다는 것이다. 웃을 때는 과하게 해맑은 표정이었지만, 그때를 제외하고는 주로 무표정했다. 어떤 순간에도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 낯 두꺼운 인물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조심해야 한다'라는 생각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잊게 되었다.




호주의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1년짜리인데, 시골 농장에서 3개월 일을 하면, 1년 연장을 할 수가 있었다. 호주에 올 때 같이 왔던 친구들과 농장에서 3개월을 지낸 후, 우리는 모두 수월하게 비자를 연장했다. 시드니에 재정비의 시간을 갖고, 나의 동반자 '리나'와 함께 다시 농장으로 향했다. (리나가 누군지 궁금하다면? 09화 그녀 5, 그녀와의 행복했던 1년.)


앞선 3개월 동안 농장에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 사과를 따고, 와이너리 농장의 포도를 따고, 딸기 농장에서 모종을 포장하는 일을 한 것은 비자 연장을 위해 기간을 채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그때 했던 일로 돈을 많이 모을 수 없었다. 3개월 동안 생활비를 쓰고, 4명이서 타고 다니던 차를 인수하는 돈 3,000달러를 지불하고 나니 한 두 달의 생활비가 남았다. 나의 최종 목표는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호주의 바로 옆 나라 '뉴질랜드'에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호주의 자연경관이 100점이라면 뉴질랜드는 100점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얘기를 많이 들어보기도 했고, 살면서 남반구에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다시 농장으로 떠나는 나의 목표는 '돈을 모으는 것'이었다. 다가오는 시즌에 어느 지역에서 어떤 작물을 공략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더라는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앞선 농장 생활에서 퇴근 후 축구를 하며 친해진 아프가니스탄 출신 친구에게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목적지는 돈을 잘 벌 수 있는 농장 지역이었고, 내가 돈을 위해 그곳에 가는 것처럼, 돈에 환장한 사람들이 모여들 것은 어느 정도 예상을 했다.


시드니에서 북쪽으로 1,000km를 달리고, 250km를 더 올라간 후 도착한 곳은 토마토가 유명했다. 토마토를 따면 무조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들었다.


부푼 기대를 갖고 처음 도착해서 한 일은 유스호스텔에 짐을 풀고, 동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주의 여느 시골과 똑같이 한적했다. 허허벌판이었다. 태양의 뜨거움이 절정에 달하는 낮 시간이라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래된 목조 건물 그늘 밑에 배를 깔고 누운 고양이가 하품만 하고 있었다.


농장 생활을 한 번 해봤다고 모든 풍경이 익숙했다. 그리고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일자리를 찾는 동시에 몇 달 지낼 숙소를 구해야 했다. 그런 정보는 대부분 마을에 딱 하나 있는 '인포메이션 센터'에 가면 얻을 수 있었다. 작은 마을 규모에 맞게 서너 평 남짓 하는 크기의 인포메이션 센터에는 시큰둥한 표정의 여자 직원이 한 명 앉아 있었다.


"나 방금 여기 도착했는데, 일자리 있을까?

"아니, 일 구하려면 한 달은 걸릴걸?"

"진짜? 이번 달부터 여기 일자리 많을 거라고 들었는데..."

"본격적으로 바빠지려면 아직 더 기다려야 해. 네가 너무 빨리 왔어."


이런.. 그랬다. 나에게 이곳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라고 알려준 친구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곳이라고 했지,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그가 말해주지 않은 게 아니라 내가 묻지 않았다. 그런 디테일까지 물어보는 센스가 없었다.


몇 달 전, 처음 농장에 갔을 때도 일을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인포메이션 센터를 통해 며칠 일할 수 있는 농장은 구했지만, 한 두 달 길게 일할 수 있는 농장은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같이 간 친구들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오롯이 혼자였다. 어설픈 영어로 어디가 사무실인지도 모를, 사무실이 있기는 한지도 알 수 없는 농장을 무턱대고 들어가고는 했었다. 다행히 젊은 청년(불쌍해 보이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혼자 그렇게 해야 할 생각에 막막했다.


숙소도 문제였다. 일이 구해질 확률이 보여야 몇 달간 연속해서 머물 집을 계약을 할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며칠은 유스호스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필요한 음식과 맥주 몇 병을 사서 유스호스텔 침대에 누웠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돈을 최대한 아껴야겠다.'


유스호스텔은 편하긴 했지만, 오래 머물기에는 적당한 가격이 아니었다. 다음 날 다시 인포메이션 센터로 갔다.


"일할 사람 필요하다는 데 없어?"

"응, 어제랑 똑같아. 본격적으로 사람이 필요하려면 몇 주는 기다려야 할걸?"

"그러면 여기 마을에 유스호스텔 말고 다른 숙소 없을까? 유스호스텔은 좀 비싸서.."

"그런 거라면 추천해 줄 데가 있지, 여기서 차로 10분 거리에 '로즈베이 카라반 파크'가 있어. 거기 한 번 가봐."

"고마워."


카라반 파크라고 쉽게 설명하면 캠핑카가 드나들 수 있는 캠핑장이다. 그런데 카라반 파크를 알려준다고? 이상했지만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나는 여직원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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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구석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니, 나무 울타리가 둘러쳐진 '로즈베이 카라반 파크'가 나타났다. 사무실로 보이는 곳 앞에는 '할리 데이비슨' 바이크가 세워져 있었고, 남자 사장님으로 보이는 사람은 호주의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가죽 재킷에 카우보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여기 숙박할 수 있어?"

"응, 할 수 있고 말고. 그런데 텐트 자리밖에 없는데 괜찮겠어?"

"얼만데?"

"2주에 150달러."

"응?? 괜찮고 말고."


참고로 유스호스텔은 1박에 40달러 정도였었다. 2주면 할인 혜택을 받아도 500달러는 들었다. 그런데 2주에 150달러라니. 군대도 다녀온 남자가 텐트에서 자는 걸 두려워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유스호스텔에 이틀 더 머물고 카라반 파크에 짐을 풀었다. 카라반 파크에서 빌려주는 2인용 텐트에(캠핑용 텐트라기보다는 한강 공원에서 나들이할 때 쓰는 그늘막 텐트에 가까웠다.) 갖고 있던 침낭 하나면 충분했다. 시드니 아파트 거실에서도 지냈었는데, 텐트가 어때서? 밤에도 날씨는 선선해서 문제 될 게 없었다. 잠만 텐트에서 자고, 음식을 하고, 씻는 공간은 공용 공간으로 잘 되어 있어서 유스호스텔과 다를 게 없었다.

밤이 되면 텐트만 열어도 쏟아지는 별빛을 감상할 수 있었고. 울타리 너머로 잔잔한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낭만 그 자체였다. 이렇게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을 할 수 있다니.. 나를 호주에 오게 만든 한국의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후회와 공포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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